오월이 다 돼가는 오늘 대전에서는 눈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른바 ‘꽃샘추위’일진데 벚꽃위에 무심하게 내리는 눈이 가관이라 한컷을 남겼다. 파르르 떨다 못해 코 빠진 벚꽃잎이 봄바람에 흩날려보지도 못하고 때 모르는 진눈깨비에 애처롭게 부대끼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한라산의 때 아닌 눈꽃모습이 보인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코트를 입을까, 봄 재킷을 입을까? 뭐, 마음이야 무겁고 두꺼운, 무엇보다 너무 입어서 지겨운 코트 대신에 가볍고 화사한 봄 재킷을 입고 싶지만, 섣부른 선택은 감기를 자초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꽃샘 때문이다. 예쁜 이름에 속으면 곤란해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 이런 무시무시한 속담까지 있을 정도니까. 어쩌다가 거를 법도 한데 꽃샘추위는 꾸어다 해도 한다고 할 정도로 꽃이 필 무렵에는 꽃샘이, 잎이 필 무렵에는 잎샘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특히나 춘분 즈음에 꽃샘은 겨울 못지않게 매섭고 차기로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꽃샘바람의 실체는 소소리바람이다. ‘소소리’가 본래 ‘회오리’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어떤 시인이 ‘성깔 남은 바람’이라고 표현했던 시구가 절묘하게 느껴진다. 같은 현상을 두고 중국에서는 ‘춘한’(春寒), ‘봄추위’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하나비에’ 즉, ‘꽃 추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추위라는 말은 쏙 빼놓고 ‘꽃샘’이라고 불렀다. 이름만 들으면 어디선가 금방이라고 꽃망울을 터트릴 것 같은, 따스한 바람에 입김이 느껴진다.
꽃샘추위가 아무리 심해도 꽃이 피지 못하는 봄은 못 봤다. 아침 저녁의 일교차가 10도 이상이라고 주의를 주어도 봄꽃은 여전히 화려한 자태를 드러낸다. 나를 포함하여 인생의 화려한 꽃을 피우려는 분들, 꽃피기 직전이 가장 춥다는 사실도 꼭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꽃샘’은 ‘꽃이 피는 걸 시샘하다’라는 뜻인데 도대체 누가 시샘한다는 걸까 싶었는데, ‘풍신(風神)’ 바람의 신이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해서 꽃이 피지 못하게 차가운 바람을 불고 있다고 한다. 한 겨울 내내 자기 세상처럼 실컷 불어대고도 욕심이 남았는지 깨끗하게 물러나지 못하고 공연히 샘을 내는 풍신의 심보가 고약하다.
그러나 자신이 갖지 못해서, 혹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갖고 싶어서, 남이 잘되는 것을 미워하고 깎아 내리는 마음이 어디 풍신에게만 있을까? 헤르만 헤세(Herman Hesse)는 그런 존재들을 늙은이에 비유하면서 ‘봄의 말’이라는 시를 지었다.
어느 소년, 소녀들이나 알고 있다.
봄이 말하는 것을.
살아라, 자라나라, 피어나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기뻐하라, 새싹을 움트게 하라.
몸을 던져 삶을 두려워 말아라.
늙은이들은 모두 몸이 소곤거리는 것을 알아듣는다.
늙은이여 땅속에 묻혀라.
씩씩한 아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어라.
몸을 내던지고 죽음을 겁내지 마라.
내 속에 무엇이 소년, 소녀이고, 무엇이 늙은이 일까? 무엇이 삶을 두려워 말아야 하고, 무엇이 죽음을 겁내지 말아야 할까? 요즈음 부쩍 내 속에 있는 늙은이는 많은 것 중에서도 혼자 있으려 하지 못하거나 않는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 때는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라도 손을 뻗쳐서 세상을 나에게로 끌어들이곤 한다.
나를 찾아주는 전화벨소리가 반갑고, 길지 않은 시간차로 전해지는 메시지 알림음이 나의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준다고 느낄 때마다 그리고 다양한 활동과 성취에 대한 나의 갈망이 생산적이라고 자위하고 싶을 때마다 잠시 마음의 휴대폰을 끄고 외부를 향한 커튼을 내린다.
그리고 복잡함이 아닌 단순함속에서 내 속에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살펴보는 고독의 장소(시139:24)에 머무른다.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는 인생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는데, 난 정직함의 거울로 나를 얼마나 많이 들여다보기를 뒤로 미루는지 되짚어 볼 일이다. 고요하고 세밀한 음성에 더 정밀한 주파수를 맞추어 가 볼일이다.
이 글을 시작하고 1주일이 훌쩍 지나간 창밖에는 철쭉의 향연이 시작된다. 어디를 보아도 배꽃과 살구꽃이 더불어 자태를 뽐낸다. 달력도 설레임이 있는 오월이다. 진득하니 앉아 있고 싶으나 또 사방에서 찾아오고 천지가 달려가 봐야 할 곳이다.
단단히 마음 먹지 않으면 제 할 일을 묵묵하게 하는 꽃들만도 못할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이 많고 보고 싶은 것이 사실이나 자칫하면 나도 모르게 또 다른 내가 익숙한 습관을 좇아 시동을 걸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 봄에 아버지와 교제하고 싶으셔서 군중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셨던 주님이 들려주시는 은밀한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고독을 맛보면서, 무엇을 주시는 것에 대한 감사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에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자 간구하는 ‘존재기도’를 올려보고자 한다.
윤양수 목사 / 한소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