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랑한 햇볕 때문인지, 점점 끝자락을 보여 가는 달력 때문인지 늦가을의 햇볕은 많은 표정을 담고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벗이 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나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벗이 있다.
이 두 부류의 벗에서 우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랑만큼이나 자주 쓰이는 말이 친구이다. 사실은 아는 사람에 불과한데 단지 오랜 세월이 붙어서 친구라는 말을 할 때도 많은데, 별것 아닌 차이로 보이지만 어떤 사건이 계기가 돼서 중대한 진실을 깨닫고 나면 금방 쓸쓸해지곤 한다.
親舊란 말의 사전적 정의는 ‘오래도록 친하게 사귀어 온 사람’으로 사실은 친구인줄 알았는데 그냥 오래 알고 지낸 사람에 불과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깨달을 때가 있다. 조선 정조 시대에 선비 박제가(朴齊家)는 우정이 결코 오랜 세월에 있다고 하지 않았다.
장맛과 친구는 오래 묵을수록 좋다는 속담이 꼭 옳지만은 않다는 거다. 그가 생각했던 진정한 우정이란 어떤 모습이었을까? 벗을 사귐에 마음이 맞지 않으면 무슨 말을 나눠도 말을 꺼내지 않은 것과 똑같은 법이다.
벗을 사귐에 간격이 없다면 비록 서로가 묵묵히 있다하여도 좋은 것이다. 옛말에 머리가 새도록 오래 사귄 친구라도 처음 만난 것처럼 서먹서먹하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라도 옛 친구와 다름없다고 하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음이 잘 맞는다는 건 서로의 처지를 잘 이해한다는 뜻이다. 처지를 잘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면 다른 사람에게 꺼내고 싶지 않았던 말들이 저절로 입에서 쏟아져 나와 막을 길이 없으니 그것이 다른 사람과 10년간 사귀고 나눈 대화보다도 낫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친구라고 믿는 그는 친구일까? 그냥 아는 사람일까? 나는 그에게 친구일까? 그냥 아는 사람일까? 박제가 그가 말한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벗이 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으나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벗이 있다. 이 두 부류의 벗에서 우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모름지기 오늘은 통랑한 가을 햇볕 아래서 나의 맘에 있는 진솔한 맘을 이야기해 보자. 나에게는 뼈와 살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자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인구의 1/5쯤 차지하는 보통의 아이일 뿐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강력한 감정이 나의 희노애락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감정이지만 누구나 한번쯤 하는 보통의 사랑일수도 있다는 것,
아무리 개성 넘치는 남자와 자유로운 여자도 결혼하면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며 그렇게 보통의 부부가 된다는 것, 남들에게 한없이 매섭고 강한 사람도 맞으면 아프고 계속 아프면 부서질 수 있는 보통의 사람이라는 것, 기쁨은 두 배로 키워주고 슬픔을 절반으로 나눠주는 친구지만 나란히 가고 싶지 뒤통수를 보며 쫓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
나라는 사람은 똑같지만 어떤 사람과 비교하느냐에 따라 자신감이 생길수도 또 열등감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사람들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그들의 시선과 말들이 계속 신경이 쓰인다는 것, 순수한 마음으로 내가 가진 물질과 시간을 기꺼이 나눠줬지만 숨겨두었던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배신당한 기분이 든다는 것, 힘 있는 사람이 힘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면 이 세상을 살아갈 맛이 안 난다는 것,
그 사람이 나에게 힘을 과시하면 맞서야 하는지 순응해야 하는지 갈등하는 것, 원칙대로 살려고 하지만 나 혼자만 따르면 손해 보는 것 같다는 느낌, 어려운 일은 할 수 있지만 무거운 짐은 내려놓고 싶다는 것, 이런 보통의 느낌을 나누어보자.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인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이루신다’는 말씀 중에서 난 최근까지 ‘원하는대로 구하면 이루신다’는 부분에는 사심을 가득 담아 읽느라고 진정으로 친구되고 싶어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
오래 읽어 왔기에, 오래 불러왔기에 그 분이 나의 친구라고 믿고 싶은 것은 아닌지, 나는 그 분에게 친구가 될거라고 단정한 부분은 없는지, 주님은 나에게 벗 됨을 인하여 주님의 마음에 있는 진심을 말씀하실 때에 난 못 들은 척한 것은 없는지….
그러면서 새록새록 맑은 가을 햇볕아래서 맑은 만남을 가질 친구를 찾으시는 나의 참 친구의 초청을 들어본다. 알고 보면 우리는 얼굴만 다른 서로의 친구일지 모르니까 말이다.
윤양수 목사 / 한소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