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끝
―1944년을 중심으로―
동아기독교의 신사참배 거부가 타교단과 차별화되는 점은
1. 신사참배는 종교이며, 우상숭배이며 국민의례가 아니기에 굴복을 하지 않았다.
2. 신사참배에 대하여 전교단적으로 전교인이 일치하여 거부하였기에 지도자들은 순교하고, 교단이 해체되었다. 타교단은 교단 지도자들이 친일 협력을 하고, 일부 지도자가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를 당하였지만 교단적으로는 굴복 성명서를 발표하고 자진 해산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3. 교단적인 신사참배거부는 신앙의 시금석이었다는 기준에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불과 같은 시험을 통과하였다는 것이다.
4. 교단적인 신사참배거부는 황민화정책, 내선일체을 거부한 신앙의 문제인 동시에 명백한 교단적인 독립운동이었다. “신사참배와 천황숭배의 강요와 같은 일제 말기의 상황에서 ... 이들의 저항은 일제의 국가적 동원과 독려에 모든 구성원들이 동참하고 가담하는 상황에서 지극히 반역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 한국 기독교 저항자들의 동기는 순수한 신앙적 발로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서는 한국민족주의, 반일의 현상으로 다스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주기철과 그와 동류하는 보수주의 신앙인들은 일제 말기 상황에서 한국기독교회의 민족적 저항을 끝까지 관철시킨 대표적 저항자들로 간주된 것이다.”
신사참배가 처음부터 문화침략내지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고, 일본의 신민화정책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일제가 침략의 초기부터 정치 군사 경제적 침략과 맞물려 신사를 침투시켰다는 점에서 여기에 대한 항거는 일제의 민족주의적 문화침략에 대한 항거였다는 점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항거의 주체의 개별적 의도야 어떠하든지 민족 운동 내지는 민족 수호를 위한 항일 운동”의 차원에서 평가되어져야 한다.
5.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과정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여 교회와 신앙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민족정신을 고양하고, 독립 운동에 참여하는 결과를 동반함으로써 순교한 믿음의 선조들을 본받아야 한다. 이것은 역사적인 기념일을 세워 그 뜻을 기리고, 믿음의 후손들에 물려주어야할 영적인 유산이다.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도 신앙을 지켰던 우리 교단이 그 신앙의 후손으로서 다시한번교회 부흥을 일으키는 역사적인 주역이 되도록 하는 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책무라고 여겨진다.
신사참배는 모든 종교는 살아있는 신(神)인 천황제 아래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었다. 천황을 숭배하는 황국신민을 만들려면 신사에 제사를 드리도록 강요해야만 했다. 모든 것이 천황을 위하여, 천황의 통치 아래 있는 신사제도를 통하여 통제하려고 한 것이다. 천황의 신민, 곧 황국신민이 되려면 신사참배를 해야만 했다.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강요였다. 조선인을 일본인 화하여 조선의 얼과 말을 말살시키려는 강압적인 획책이었다. 그 도구로 사용된 것이 신사이며, 신사참배를 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다. 창씨개명으로 일본인이 되게 하려고 했듯이 신사참배로 천황의 신민이 되게 하려고 한 강요였다.
이 일에 가장 걸림이 되었던 것이 기독교인들이었다. 신앙의 문제였지만 현상은 그렇지 않았다. 일제의 국가적인 차원에서 강제 명령으로 모든 조선인들이 참여하는 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반일운동, 항일운동, 민족운동, 독립운동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은 천황의 신민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고, 자주 민족의 독립을 위하는 반역 행위로 일제에게는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기에 그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악랄하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동아기독교가 타교단과 차별화되는 것은 全지도자의 신사참배거부, 全신자의 신사참배거부, 친일 협력 거부로 인하여 검거, 투옥, 옥중 순교와 교단해체령의 형극(荊棘)이 있었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지난 지금, 그것을 자타가 공인하는 역사적 인정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에, 안타깝게도 사료의 부재가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역사적 사건이 있었고, 박해와 순교자들과 관련된 증언이 있음에도 재판기록에 대한 물증을 찾지 못하고 있음으로 인하여 교단 내의 일로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들의 증언들은 수없이 많이 있지만 그것을 공적인 증거로 학계나 국가에 제출하여 확증할 수 있는 기록들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실례로 주기철 목사의 재판 기록은 있어서 국가보훈처에서 인정(주기철 목사 항일독립운동가 기념관 세워짐)을 받았지만, 전치규 목사의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해서 국가보훈처로부터 항일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전 국민적인 신사참배 강요로 천황의 신민을 만들려고 하였던 일제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인들이었다. 하나님보다 더 높은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앙을 수호하는 것이 곧 천황의 신민이 되지 않는 것이었으며, 독립운동을 하는 것과 동일한 길이었다. 신앙을 지킴으로 독립운동이 되었고, 신앙을 지킴으로 순교자의 길을 걷는 것이 되었다. 신앙을 수호함으로 국가와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을 걸어간 것이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박해와 순교였다.
한국침례교회사를 연구하는 교단과 학계의 학자들이 일천한 상태에서 본 논고가 이제부터라도 역사를 중요하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교단적으로는 펜윅 선교사의 신앙의 정수를 이어받은 순교자들의 신앙을 반드시 기억하고, 교단의 수난인 동아기독교의 해체령이 내려진 5·10기념일을 제정하여 순교교단의 신앙을 회복하여 하나님께 더욱 영광 돌리는 교단이 되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