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이 침례파라는 조롱 섞인 이름으로 불리어진 아픈 이름을 무엇 때문에 자랑스러워했을까요? 한국에서 선교역사를 선점해서, 교육, 의료선교, 아니면 많은 인재를 배출했거나 사회참여 때문일까요? 이 질문에서 우리는 흔쾌하게 답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몇 년 전 타 교단 지도자 한분으로부터 저녁식사를 초대를 받아 식사 후 산책 겸 카페를 찾으면서 서울 중심부에 있는 자기 교단 빌딩들을 소개하고 이어서 교육기관들과 병원들을 말하는 나도 모르게 ‘엄청나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교단의 자산이 얼마나 될까? 생각하는 순간 비교할 수 없이 빈약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특별한 보물은 무엇일까요? 저는 누구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사랑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여행자로서 로마에서 추방당한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행색은 초라했으며,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고린도인들의 문화, 지적욕구, 그리고 철학의 수준에서 볼 때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 무지한 말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도시에 가져간 것은 매력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가져간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헬라스의 별”이라 일컬어졌던 번창한 상업도시 고린도가 건설된 이래, 이보다 더 고귀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사순절을 지나면서 주님의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 번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작정해야 할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인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결단에서 가장 중요한 작정입니다.
바울사도께서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그 도시에서 가장 존경받고 또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웅변가들과 철학자들이었습니다. 바울 역시 교육의 도시 “다소”에서 성장한 사람으로서 그 시대 모든 학문을 골고루 섭렵한 석학이었습니다. 그는 시와 수사학, 미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섭렵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철학의 도시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법정”에 섰을 때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을 보면 능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행 17:18). 하지만 바울사도는 이런 학문을 철저하게 배격했습니다. 그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했고 십자가만 증거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길을 두고 뫼로 간다.”라는 말과 같이 그는 결코 사람을 의지 하거나 인간의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방법에서 교회들이 범하는 가장 큰 오류는 철학과 과학,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쇼적인 방법에 너무 유혹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우리 시대를 감동시키는 방법들 중심에 과연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있는지 면밀히 살펴봐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그 메시지 중심에 인간지식의 화려함, 해학과 풍자 레토릭이 난무하고 있지는 않는지? 그리고 공,맹자, 석가의 가르침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증거 해야 할 유일한 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지난 3.1절을 맞으면서 신사참배, 동방요배를 거절했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께서 순회목회를 하시면서 배척당하셨고 조롱당하셨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그분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눈에 보이는 십자가는 이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리석고 매력 없는 이 메시지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세상의 지식이 아무리 매력적으로 보여도 우리는 그것들을 제한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 하겠다고 작정합시다.
그리스도인이란? 언제, 어디서나 자기자랑이 아닌 주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이므로 끊임없이 자기를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육체의 연약함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스스로 연약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약하고 심히 떨었노라, Weakness and, fear and, with much trembling.”바울은 그의 육체에 심히 연약한 부분이 있었습니다.(고후 10:10; 12:7)하지만 그의 약함은 주님의 능력의 통로였습니다.
바울이 자기 능력을 믿고 고린도에 가지 않았듯이 우리 또한 그래야 합니다. 바울은 매우 두려워하며, 떨며 십자가를 증거하며 승리했던 이유는 자신이 복음에 빚진 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도 우리 침례교도들은 이 땅에서 여전히 연약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우리 연약함을 인정하고 십자가만 증거 하기로 작정을 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십자가는 오직 경험으로부터 증거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적 방법과 매력을 거부합니다.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려면 첫째 구원의 확신이 그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증거는 인간의 방법일 뿐입니다. “내 말과 전도함이 지혜의 전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바울사도는 두렵고 떨림으로 십자가를 증거 했지만 그 곳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사람의 지혜와 지식과 능력을 의지하면 결국 인간의 뿌리만 나타납니다. 그러면 사탄은 더 강력한 진을 구축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증거하면 마지막 남는 것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뿐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십자가만 증거하기로 작정합시다.
/이정일 목사 청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