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종교개혁운동과 침례교회-1

  • 등록 2016.03.18 10: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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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진 교수 / 침신대 신학과(역사신학)

유럽의 중세시대는 경제적으로는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봉건주의체제, 정치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에 의한 통치, 신학적으로는 스콜라주의 신학체계, 교회적으로는 교황을 정점으로 해서 유럽의 모든 교회들이 하나가 되어 있던 안정된 사회였다. 그러나 두 세기에 걸친 십자군 전쟁(The Crusade, 1095~1291)을 겪으면서 유럽사회의 기저는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유럽의 지식인들이 희랍의 고전들을 재발견하고 접하면서 14~15세기에 르네상스(Renaissance, 문예부흥, 재생, 재창조)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유럽사회는 점차 중세 봉건사회의 틀을 깨뜨리고 근대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유럽에서 전개되었던 종교개혁운동(Reformation)은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로마가톨릭 교회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중세적 안정(medieval stability)을 깨뜨린 사건이었고, 이단적이고 분리주의적이고 마귀적인 운동이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들은 하나님께서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더 이상 방관하실 수 없어서, “때가 차매하나님께서 예비하셨던 개혁가들을 동원하여 당시의 교회를 개혁하셨던 사건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종교개혁운동은 기독교 역사 상 반드시 일어나야 했던 필연적인 사건이었으며,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하나님께서 구원시키신 사건이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교회들 가운데에서도, 종교개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그 해석을 약간씩 달리하고 있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회는 루터를 비롯해서 깔뱅과 쯔빙글리 그리고 영국 국교회 등 주류 종교개혁(Mainstream Reformation)의 관점에서만 종교개혁을 이해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다른 말로 하면 16세기 당시, 로마가톨릭 교회와 주류 종교개혁가들로부터 이단시 되어 핍박받았던 근원적 종교개혁가들”(Radical Reformers), 특히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Biblical Anabaptists)의 개혁활동에 대해서는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듯 하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교회사학계에서는 종교개혁운동에서 차지하는 아나뱁티스트들의 역할이 20세기에 들어와 재조명되고 재평가되어 왔다. 이들은 근대적인 의미의 자유교회운동(Free Church Movement)의 원천이 되었던 사람들이다.


본고에서는 침례교운동(Baptist Movement) 역시도 종교개혁운동의 일환이었다는 관점에서 초창기 침례교운동의 성격에 대해서 살펴본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기라고 하면 루터가 95개조를 비텐베르크 성교회(Castle Church)에 게시한 해(1517)로부터 로마가톨릭 군대와 프로테스탄트 군대 간의 종교전쟁인 30년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 후 맺어진 베스트팔리아 평화협정(Peace of Westphalia, 1648)의 해까지로 잡고 있는데, 이렇게 볼 때 1609년부터 시작된 침례교운동 역시도 종교개혁운동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볼 수 있다.


I. 16세기 종교개혁운동 개관

미국 하바드대학교의 교회사 교수였던 조지 윌리암스(George Hunston Williams) 박사에 의하면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은 크게 세 흐름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단 그가 사용한 용어를 영어로 표현하면 Magisterial ReformationRadical Reformation 그리고 Counter Reformation이다. 아직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 Magisterial Reformation이란 용어가 공식적인 학술용어로 번역되지 않고 있는 것 같은데, 학자에 따라서는 제도권개혁,” 혹은 주류종교개혁,” “정부주도형 개혁등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들은 영어단어의 원의미를 제대로 전달해 주지 못하고 있다. “Magisterial”이란 단어는 “magistrate,” “magistracy”와 같은 단어와 어원을 같이 하는데, 그 뜻은 관리, 관료, 공무원, 행정장관, 세속정치인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Magisterial Reformation(크리스천) 세속관료들의 정치적인 후원을 입은 종교개혁이라는 의미에서 관료후원적 종교개혁으로 번역하였다. 다르게 표현하면 관료의존적 종교개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필자는 Radical Reformation근원적 종교개혁으로, Counter Reformation반종교개혁혹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자체개혁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1. 관료후원적 종교개혁

관료후원적 종교개혁은 앞에서 지적한 바대로 세속(물론 크리스천이었겠지만) 정치인들의 후원을 입은 종교개혁, 다른 말로 하면 정치와 종교가 협력하고 결탁해서 성취한 종교개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범주에 드는 대표적인 개혁의 흐름은 루터교회(Lutheran Church), 쯔빙글리와 깔뱅의 개혁교회(Reformed Church), 그리고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 오늘날 미국에서는 Episcopal Church, 한국에서는 성공회로 불리운다-필자 주) 등이다.


루터의 경우에는 선제후 현자 프레더릭(Elector Frederick the Wise)과 헷세의 필립(Philip of Hesse), 쯔빙글리의 경우에는 취리히(Zuerich) 시의회의 정치 지도자들이, 깔뱅의 경우에는 제네바(Geneva) 시의회의 정치 지도자들이, 그리고 영국국교회의 경우에는 당시의 영국의 왕(), 헨리 8(Henry VIII, 1491~1547)와 그의 자녀들(에드워드 6, 피의 여왕 메리, 엘리자베스 1)이 종교개혁을 후원했거나 주도했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자들은 크리스천 세속 정치인들과 실력자들의 후원을 입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정치와 종교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일치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유럽의 기독교와 미국의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미국은 최초의 연방헌법(Federal Constitution, 1789)과 수정헌법 제1(The First Amendment, 1791, “의회는 국교의 제정에 관하여 그리고 자유스러운 종교적인 활동을 금지하기 위하여 어떠한 법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표현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정부에 탄원할 수 있는 자유 등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에서 종교의 자유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맨 먼저 선언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미국의 기독교는 교파형 기독교(Denominational Christianity)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유럽의 기독교는 대체로 시교회(City Church) 혹은 국가교회(State Church, National Church) 혹은 교구교회(Parish Church)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루터교회는 독일과 덴마크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에서 국교적 지위를 유지하고 있고, 존 낙스(John Knox, c. 1514-1572)에 의해 개혁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그 나라의 국교가 되었다. 영국국교회는 영국의 왕이 교회의 수장(head of the church)이 되어 있다.

이것은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중세시대 로마가톨릭 교회가 유럽의 모든 세속국가들과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폴란드 등의 국가에는 헌법 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긴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로마가톨릭 교회가 국교와 같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모두 로마가톨릭 교회의 유아 밥티스마(infant baptism, 유아세례)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와 종교의 합일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즉 어린 아이가 출생을 하면 그 지역을 관장하는 행정관청에 호적신고를 하고, 동시에 그 행정관청의 관할 하에 있는 교구교회에 유아 밥티스마를 받으면서 교적신고를 하는 것이다. 아직 영적인 출생을 경험하지 않은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의 영혼을 세례의식을 통하여 육체적 출생과 함께 교회에 입적을 시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세 시대에는 유아 밥티스마가 국가와 교회를 잇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한 목자 아래 한 양떼”(One Flock under One Shepherd), 즉 교황 한 사람 밑에 유럽의 모든 주민들이 한 양떼가 되어 있던 중세적 이념이 유아 밥티스마라고 하는 끈끈한 전통을 통해서 지탱되고 있었던 것이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로마가톨릭 교회를 개혁하기는 했지만, 국가와 교회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개혁해 낸 교회들은, 교회가 세속국가의 정치권력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던 신약성서적 교회(New Testament Church)와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었다.

 

2. 근원적 종교개혁

조지 윌리암스 박사는, 종교개혁 당시에 교회는 어디까지나 예수 믿는 신자(believers)들의 공동체여야 하고, 따라서 중세 800~1000년 동안의 로마가톨릭 교회의 전통이었던 유아 밥티스마는 성경적이지 못한 인간적인 고안(human invention, 인간의 발명품)이어서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며, 교회와 국가 혹은 종교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개혁가들의 종교개혁을 Radical Reformation이라고 명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단어를 일반적으로 급진적 종교개혁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그들 중 Anabaptists재세례파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급진적이라는 말은 대체로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뉴앙스를 갖는 단어이다.


그러나 Radical이라는 단어에 급진적혹은 과격한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긴 하지만, 보다 정확한 문자적인 의미는 근원적이라는 뜻이다. 영어에서 Radical이란 단어는 Root(뿌리, , 근원)와 어원을 같이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근원적 종교개혁가들은 교회의 뿌리인 신약성서 시대의 교회를 회복(restitution)하고자 하였다. 윌리암스 박사도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과 신령주의자들과 복음적 이성주의자들이 권위의 원천이 무엇이냐에 따라 약간씩 신앙의 강조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믿음의 뿌리를 찾아가고자 했다”(cutting back to that root)는 점에서, 위의 세 그룹이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그들의 개혁을 근원적 종교개혁이 되게 했다고 말했다. <계속>

/ 김승진 교수 침신대 신학과(역사신학)

  예사교회 협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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