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신령주의자들
“신령주의자들”(Spiritualists)은 신앙생활의 권위를 성령(Holy Spirit)님께 두었다. 성경 말씀보다도 성령님의 조명과 직통계시를 보다 더 중요한 권위로 인정하면서 역동적인 신앙을 중요시하였다. 자연히 이들은 지상의 가시적인 교회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위기적인 시한부 종말론에 집착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신앙은 자칫 감정주의(Emotionalism)와 신비주의(mysticism)와 극단적 주관주의(extreme subjectivism)에 빠지곤 하였다.
또 이들 중 일부는 당시의 피압박계층이었던 농민들이 폭동이나 전쟁을 일으킬 때 선두에 서서 지휘하기도 하였고, 무력을 동원하여 이 지상에 천년왕국을 건설하고자 기도하기도 하였다. 독일 농민전쟁(German Peasants' War, 1524~1525)이나 뮌스터 폭동사건(Muenster Revolt, 1534~1535)도 이런 부류의 시한부 종말론에 빠졌던 극단적인 신령주의자들에 의해 자행된 불미스러운 사건이었다.
이 부류에 속하는 신령주의자들로는 토마스 뮌쩌(Thomas Muenzer, 1490~1525), 니콜라스 스토르크(Nicholas Storch)와 같은 쯔비카우 예언자들(Zwickau Prophets), 카스파르 폰 스벵크펠트(Carspar von Schwenckfeld), 세바스챤 프랭크(Sebatian Frank), 그리고 뮌스터 폭동의 주역이었던 얜 마티스(Jan Matthys)와 레이던의 존(John of Leyden) 등이 있었다.
3.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Biblical Anabaptist)에게 있어서 권위는 바로 성서, 특히 신약성서(New Testament)였다. 이들은 지상에 존재하는 가시적인 교회(visible church)를 매우 중요시하였으며, 가시적인 교회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 신자(believer)가 되는 것이 전제조건이었고, 자신의 신앙을 밥티스마를 통해서 고백해야 했다. 이들은 오히려 지나치게 성서에 집착하는 “천진난만한 성서주의자들”(naive biblicists)이었다.
초창기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은 쯔빙글리의 개혁에 동참했었던 제자들이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면서 유아세례가 성경적이지 않은 인간적인 전통에 근거한 의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뱁티즘은 오직 신자들에게만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취리히 시의회 의원들의 후원을 입으며 개혁활동을 하던 쯔빙글리는 유아세례의 전통을 고집하였다.
결국 제자들은 스승인 쯔빙글리와 결별을 하였고, 1525년 1월 21일에 신자의 뱁티즘(believer’s baptism)을 행하며 종교개혁운동에서 새로운 물꼬를 텄다.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펠릭스 만쯔(Felix Manz), 마이클 자틀러(Michael Sattler), 게오르게 블라우락(George Blaurock) 등의 스위스 형제단(Swiss Brethren)과, 발타자르 휩마이어(Balthasar Huebmaier), 한스 뎅크(Hans Denck), 필그람 마르펙(Pilgram Marpeck), 제이콥 후터(Jacob Hutter) 그리고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등이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이었다. 이들은 성서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려고 했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이들은 로마가톨릭 당국과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순수한 사도적 신앙 즉 세속정치에 의해 때묻지 않은 신앙을 견지하고자 했으며, 자신들의 신앙을 위해 로마가톨릭 교회와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로부터 기꺼이 핍박을 감내하며 순교하기를 각오한 신자들이었다. 오늘날 이들의 “직접적인 역사적 후예들”에는 메노나이트들(Menonnites), 후터라이트들(Hutterites), 그리고 아미쉬들(Amish) 등이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