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5장 1~2절에는 시종들 앞에서 체면을 가리지 않고 방성대곡하는 요셉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바로의 궁전에도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내어 울었습니다(에트 콜로 삐브키). 왜 요셉은 그렇게 울었습니까?
지나날 형들에게 당했던 기억에 억울해서도 아니고 과거를 회상하며 서러워서 운 것도 아닙니다. 식량을 구하러 온 자기 형들이 자기가 요셉인줄은 상상도 못하고 자기 앞에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모습 때문에 감사와 용서하는 마음이 같이 어우러져 울었던 것입니다.
대암학자로 잘 알려진 이병욱 박사는 “눈물은 하나님이 주신 천연 항암제”라고 하면서 눈물 예찬론을 펼쳤습니다. 미국의 생화학자 빌 프레이는 우리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몸 속에서 카테콜아민이라는 호르몬이 다량 분비가 되는데 몸을 해롭게 하는 독소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나 용서나 사랑 등의 감정을 담아 진정으로 눈물을 흘릴 때 몸 안에 나쁜 물질이 빠져 나감으로 독소가 제거된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리내어 운다면 아마도 웬만한 병들은 다 고침을 받을 것이라 믿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유일한 피붙이인 베냐민을 자기 곁에다 두고 싶어서 방법을 고안했는데 여기에 형들이 모르고 당했습니다. 곡식 자루 속에 은잔을 몰래 넣어 두고서 훔쳤다고 누명을 씌워서 베냐민을 붙잡아 두고 못가게 하자 유다가 나서서 간청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드러내신 것”이라고 고백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뉘우칩니다(창44:16). 그러면서 요셉에게 베냐민을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해달라면서 대신 자기가 종이 되겠다고 울먹이며 매달립니다(창44:33~34). 이것을 보던 요셉은 참아오던 눈물을 더 이상 억제하지 못하고 쏟아낸 것입니다. 유다가 보여준 진정한 사랑과 희생을 결단하는 모습이 요셉의 마음을 단번에 열고 23년 동안 쌓였던 감정의 담을 순식간에 무너뜨렸습니다. 유다야말로 요셉을 살려주고(창37:25~28) 아버지와 베냐민을 살려주려고 희생을 자처한 휘핑보이가 됐습니다.
옛날 유럽의 왕실에는 휘핑보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휘핑보이(whipping boy)는 왕자나 왕족들이 잘못을 했을 때 왕자대신 매를 맞아주는 소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종은 아닙니다. 왕자의 친구로서 함께 교육을 받으며 상당한 대우를 받기도 합니다. 훗날에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대신 벌을 받는다고 해서 “희생양” 또는 “속죄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휘핑보이처럼 오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값을 지시고 구원하시려고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주님이야말로 우리를 위한 속죄의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과 유다를 본받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살려주는 사람입니다. 남을 성공시켜주는 게 우리의 기쁨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들이 잘 되도록 세워주고 축복하며 섬겨주는 거룩한 휘핑보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도 유다처럼 다른 이들을 살려주는 자가 되어 남은 생애를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김형윤 목사 / 서울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