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위인자자 출필고반필면”(夫爲人子者 出必告反必面)이라는 옛 교훈이 있다. 자식은 집을 나갈 때는 반드시 부모에게 고하고 돌아와서는 대면하고 인사해야 한다는 말이다. 즉 사람은 출입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교수 시절, 어느 여름 방학에 총장실에서 대학원 소속 교수 한 사람을 찾는다는 급한 전갈이 있었다. 대학원 조교들까지 동원해서 여기저기 수소문한 결과 뜻밖에도 그 교수는 해외에 나가 있었다. 교수들에게는 방학 동안에도 보충수업과 성적확인 기간이 있고 각종 위원회와 논문지도, 학생모집 등의 부가업무가 있어서 장기간 해외 채류는 불가능하며, 또 교직원은 해외에 나갈 때는 반드시 절차를 거쳐 대학에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가 무단 출국한 것은 대학과 학생들에게 불편을 주었을 뿐 아니라, 좋지 못한 선례까지 남기게 되었다. ‘출필고’ 하지 않은 불상사이다.
한 번은, 목회하는 친구가 선교지에 가야할 일이 생겼다면서 한 주간 동안 세 번의 설교를 부탁하기에 기꺼이 수락하고 친구의 교회에 가서 예배를 인도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돌아온 후에도 전화 한 번 하지 않았다. “우리 교회 와서 수고 많았어. 덕분에 잘 다녀왔네” 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반필면’ 하지 않아 섭섭함을 남긴 경우이다. 목회자들은 때로 교회나 공공 기관으로부터 행사 참가와 순서 의뢰를 받고 먼 길을 갔는데 맞이해주는 이도 없고 순서에는 들어 있지도 않은 경우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것은 초청자 측의 실수가 분명하지만 공인으로서 떠나기 전에 거취(去就)를 밝히지 않은 당사자의 불찰 또한 크다 하겠다.
반필면 하되 출필고 하지 말라
그런데, 우리 역사에는 이와 같은 고전적 가르침에 반해서, “반필면 하되 출필고 하지 말라”는 엄한 명(命)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으로부터 암행어사로 임명 받은 관리는 명이 떨어지는 즉시 임지로 떠나야지 집에 가서 가족에게 작별을 고한다거나 자신의 임무를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있었다.
병자호란(639년, 인조16년) 후 전국에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해지자 나라에서는 조선 팔도에 암행어사를 파송해서 민심을 살피게 했다. 이 때 함경도 암행어사로 임명 받은 이행우(李行遇)와 평안도에 임명받은 김진(金振)이 임지로 떠나기 전에 잠시 집에 가서 가족과 작별을 한 일이 있었다. 후에 그것이 사간원(司諫院)에 알려지자 사간원은 임금에게 그 두 관리의 파직을 간하였고 임금은 이듬 해 그들을 파직했다.
“출필고 반필면 하라”는 것은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교훈이요, “반필면 하되 출필고 하지말라”는 임금의 명은 큰 임무를 부여 받은 공직자의 도리에 대한 지시이다. 공사 간에, 요긴한 때에 슬며시 사라졌다가 말없이 나타나서 제 자리를 찾아드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