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 기독론: 사도바울의 기독론(8)

  • 등록 2016.10.13 11: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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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 담긴 신학 산책
김광수 교수 침신대 신학과(신약학)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지혜와 계시의 성령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아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한 계시를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소식인 복음은 근본적으로 만세 전에 감추어졌던 비밀이기 때문에, 그 비밀은 오직 성령의 계시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알려진다는 것이다. 이 복음의 비밀은 이전 세대들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택하신 종들(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셨다(3:5). 뿐만 아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하나님이 그의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성령의 계시를 통해 알려주셨다(1:26). 사도 바울은 이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알며 그 생명과 권능을 풍성하게 누리고 나아가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의 절대적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이러한 성령을 통한 계시의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이러한 계시의 은혜를 받도록 기도하고 있다. 그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기도제목을 말하면서 먼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받도록 기도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1:17). 바울은 이 구절에서 성령을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말한다. 여기서 지혜계시라는 단어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관련하여 핵심적으로 중요하게 나오는 것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을 아는 일에 있어서 핵심적인 단어들이다. 구약에서 지혜의 영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게 하는 지식과 총명과 결단과 추진력과 관련하여 나온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때 제사장 직분을 위한 옷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지혜의 영으로 채워준 사람들이었다(28:3). 모세가 출애굽의 대역사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지혜의 영이 임했기 때문이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34: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안수했을 때, 지혜의 영이 여호수아에게도 전달되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모세와 같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 곧 지혜의 영이 충만한 분이 될 것을 예언했다: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리니”(11:2). 지혜의 영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알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동할 수 있는 품성과 지식과 추진력을 제공하며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갈 수 있는 상상력과 창의력과 생명력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사도 바울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도록 기도하는 첫째 목적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이론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안다는 동사는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관하여 피상적으로 또 표현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확실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여 체험적으로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확실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이 동사는 엠마오 사건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체험의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두 번이나 나온다. 두 제자는 부활의 주님이 현현하시어 곁에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눈이 가리어져서 그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24:16). 그래서 주님의 책망을 받고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실 때에 그들의 눈이 열리면서 그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다(24:31). 이 동사는 엠마오 사건에서 알아보다라는 동사로 두 번 사용되었는데, 그때 알아본 것은 그들의 영적인 눈이 열리면서 부활의 주님이 보이고 가시적인 세상 배후에 보이지 않는 부활의 세계와 부활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깨닫고 확신하게 된 것을 나타낸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기도한 것은 이와 같이 성령의 계시를 통해 살아계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확실하게 알게 해달라는 기도제목이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 전능하신 능력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오늘도 내 삶에 함께하시어 축복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방식으로 아는 것이다. 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3:8)라고 말했는데, 거기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로 성령의 계시를 통해 그 분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눈이 열리며 그 분의 내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방식으로 아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를 알려면 반드시 성령의 계시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 임하시면 내 마음에 뜨거운 감동이 오고 말씀의 깨달음과 확신이 주어지며 그 감동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나의 창조자, 나의 구원자, 그리고 나의 주권자로 믿고 고백하는 믿음의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위한 바울의 기도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하는 것으로 확대된다. 그것은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짐을 말한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1:18). 바울이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위해 기도하는 둘째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은 마음이라는 인간의 내면세계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열리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마음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카르디아인데, 그것은 인간의 내면세계 전체를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전체적인 하나로 생각하는 일세기 유대인들의 통전적 사고를 따른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에도 사람의 마음에서부터 모든 더러운 생각들과 행동들이 나온다는 것을 통해 사람의 내면세계를 전체적으로 보는 유대교적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헬라인들은 분석적인 사고력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내면세계도 분석적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세계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생각하고 감정을 갖고 의지가 있는 정신적인 부분인 반면, 둘째는 더 깊은 영역 혹은 더 높은 영역이 있어 그 부분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정신적인 부분을 헬라어로 누스’(정신, 지성)라고 불렀으며 더 깊은 영역을 헬라어로 프뉴마’()로 불렀다. 바울은 헬라계 유대인으로서 헬라인들의 이러한 용어 사용을 수용하여 헬라인들을 향한 복음 전파에 사용했다. 따라서 바울이 마음의 눈을 연다는 표현에서 사용한 마음’(카르디아)에는 프뉴마’()누스’(정신, 지성)가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한글 성경에는 정신과 지성을 가리키는 헬라어 누스마음으로 번역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내면에서 마음’(누스)육신’(사르크스)이 싸우는데,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결국은 육신이 이긴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 여기서 마음은 헬라어로 누스이며 그래서 그 의미는 내 지성(누스)으로는 하나님의 법이 의롭고 거룩하며 신령한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죄의 법을 섬기는 연약한(곤고한) 인간인 것을 제시한다. 좀 더 구체적인 예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의 관계를 설명하는 내용에서 마음(누스)과 영(프뉴마)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 14:14~15). 방언은 영(프뉴마)으로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역이 없으면 무슨 기도를 하는지 마음(누스)에서 알 수 없다. ‘마음’(누스)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무슨 기도를 하는지 알면서 기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바울은 영으로 기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며 또 영으로 찬미하며 마음으로 찬미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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