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신조(Formula of Concord)

  • 등록 2017.04.14 14:13:12
크게보기

‘도한호 목사의 목회와 상식’- 125

루터(M. Luther,1483-1546)와 멜랑히톤(Philipp Melanchthon,1497-1560)은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선봉 주자들이다. 종교개혁은, 천여 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정권을 등에 업고 천하를 호령해 온 로마가톨릭교회와 맞서는 거사인 만큼 조직화 된 지지 세력 형성이 필요한 운동이었다.

16세기 초에는, 알다시피, 스위스 중심의 쯔빙글리(Urlich Zwingli,1484-1531)와 칼뱅(John Calvin,1509-1564)의 개혁교회와 독일에서 시작된 루터와 멜랑히톤의 개혁세력이 양대 산맥을 이뤘다. 종교개혁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헤세 주의 제후 필립(Philip of Hesse)은 개혁 세력 간의 연대를 목적으로 1529년에 루터와 쯔빙글리 진영 간에 마르부르크 회담”(Marburg Colloquy)을 주선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회담은 슈바바흐 조항(Articles of Schwabach) 15개 중 마지막 조항인 성만찬에 합의를 보지 못해 실패로 끝났다. 그 후, 1570년에는 루터파 개혁파 보헤미안형제단이 일치를 위한 노력으로 센도밀합의”(Consensus of Sendomir)를 발표했으나 역시 성만찬에 대한 견해 차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루터파의 개혁운동을 이끈 멜랑히톤은 21세에 비텐베르크 대학의 희랍어 교수가 됐고, 36세 때인 1519년에는 루터와 함께 라이프찌히 공개 토론회에 참석하기도 했고, 1521년에는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조직신학 저술로 보이는 신학개요”(Loci Communes)를 펴냈으며, 1530년에는 루터교의 교리와 삶의 지침을 진술한 28개 조항의 아우구스부르그 신앙고백(Augusburg Confession) 초안을 작성하기도 한 걸출한 학자요 행동가였다. 멜랑히톤은 루터가 죽은 후 그의 신학을 정리하면서 루터와 다른 견해 몇 가지를 표명했다.

첫째로, 루터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노예의지론(Bondage of the Will)을 주장한 반면에 멜랑히톤은 신인협동설(Synergism)을 주장했다.


둘째로, 루터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체험적 믿음(trust)을 강조한 반면에 멜랑히톤은 복음에 대한 지적 동의(intellectual assent)를 강조했다.

셋째로, 루터는 주의 만찬에서 예수의 실제적 임재(Real Presence)를 주장했으나 멜랑히톤은 영적 임재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루터교는 한동안 실재적 임재설을 따르는 강경 루터파와 멜랑히톤의 수정안을 따르는 필립파로 갈라져서 논쟁했다. 루터교는 멜랑히톤 사후 20년이 지난 1580년에 양 파 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새로운 신앙고백을 채택했으니 그것이 곧 일치신조이다. 루터교회는 오랜 토론 끝에 루터의 실제적 임재설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일치신조 이후에는 주의 만찬 문제로 드러나게 논쟁을 벌인 일은 없는 것 같다.

관리자 기자 bpress7@hanmail.net
- Copyrights ⓒ침례신문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7238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 76길 10, 11층 침례신문사 (02) 2681-9703~5 Fax (02) 2681-9706 bbbbb9191@naver.com l bpress7@hanmail.net 등록번호 : 서울, 다06725 | 등록일 : 1977년4월14일 | 발행인 : 침례신문사 강형주 | 편집인 : 강형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