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적인 관점에서 본 갈라디아서의 구원론-6

  • 등록 2017.04.21 12:4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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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A.D. 400년경에 영국의 가장 초기의 신학자요 평신도로 간주됐던 펠라기우스가 로마를 방문하여 로마의 타락함을 목격하고, 그 곳에서 그는 로마의 타락 원인을 어거스틴에 의한 “운명론적 결정론”에 있다고 비판했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고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면 인간은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는 이 운명론적 결정론이 기독교인들을 무책임하고 나약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고 주장했다. 결국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공로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고, 인간의 의지의 무용성을 주장하지 않고, 그 의지에 의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는 A.D.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정죄를 받았고 그는 이단의 대명사로 낙인찍혔다. 이로써 펠라기우스주의는 곧 이단으로 통용됐고 기독교 역사에서 그 오명을 결코 씻지 못했다. 어거스틴과는 달리,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타락한 인간은 원죄에 매인 것이 사실이지만 완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고 자연 이성의 빛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운 자질을 선물로 인간 영혼에 주입(inject)시킨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주의주의(voluntarism)였던 아퀴나스는 그의 ‘신학대전’에서 ‘칭의’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자연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은혜의 도움이 없어도 ‘칭의’를 향하도록 자신을 준비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 경향성을 공로적 적합성(de congrou)이라 한다. 그러므로 가톨릭에서 구원이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기정사실이 아니라 가톨릭교회에 복종하여 선행을 계속하고 의식을 계속 지킴으로 얻어지는 과정으로 본다. 심지어는 구원은 연옥에까지 가서도 계속해야만 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구원론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인들은 그리스도께 직접 다가가지 못하고, 구원을 주는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만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있고 성자들의 공력과, 고해성사와 선행과 나를 위한 다른 사람들의 고행과 교황에 대한 순종과 교회의 명령들에 대한 복종 등이 필요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언급된 칭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기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관점에서는 어거스틴의 은혜론은 중요하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부터 6장까지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행하라”는 성화의 부분이 언급된다. 이런 관점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순종하는 부분이 필요하다고 본다. 어거스틴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인간의 내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내적인 경건을 추구했기에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축소시키는 것 같은 인상을 줬고 반면에 펠라기우스와 펠라기우스주위는 인간의 도덕성 회복을 위해 자유의지와 율법준수를 강조했지만, 정작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데는 소홀히 했다.


오늘날 펠라기우스는 이전에 받았던 오명에 대하여 재평가 되어 그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면서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를 오해했다는 견해들도 주장되고 펠라기우스가 의도했던 바를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은혜론이 인간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모든 것이 결정되는 꼭두각시로 만든다고 봤다. 또 인간을 하나님에 의해 조정되는 무능력자로 만들어 인간의 도덕적인 활동의 근거를 파괴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펠라기우스는 ‘인간에게 노예의지만 있고 독자적인 자유의지가 없다면 죄에 대한 책임 소재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책임감을 강조했는데 이는 오늘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드는 한국교회에 시사하는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펠라기우스주의는 역사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계속 출현됐고 지금까지도 ‘믿음이냐 행위냐’라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결국 펠라기우스주의는 행위 구원론을 주장하여 가톨릭의 선행구원사상에 영향을 준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자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삶과 펠라기우스주의는 구별돼야 된다고 본다. 믿음과 행위를 이분법적으로 보고 행위를 말하면 무조건 펠라기우스주의라고 매도하는 일은 재고되어야 한다. 믿음에는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필수적으로 수반된다는 것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론과 합치된다. 특히 갈라디아서는 칭의를 종말론적 개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즉 바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라고 고백한다.


갈라디아서의 칭의 교리는 행위와 분리된 칭의 혹은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중요하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순종의 삶이 필요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다보니 은혜로 말미암아 진리에 순종하는 삶에 관한 부분은 중요시 하지 않게 됨으로 중세 가톨릭의 구원관이 자유방임으로 가거나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받는다는 율법주의로 가게 됐다. 인간의 책임은 배제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만 전부라고 한다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행위심판을 설명할 길이 없게 된다. 인간이 의롭게 되고 거듭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되지만 그 다음에 은혜 안에서의 삶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순종과 행함이 필요한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이 성령을 강조한 것은 은혜로 인한 순종의 삶에 있다고 본다.
마르시온(Marcion)은 갈라디아서가 유대교의 모든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 이해해 구약을 무용지물로 생각했으나 어거스틴은 갈라디아에서 구약을 적극적으로 사용한 바울의 입장에서 구원의 서정을 설명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를 율법과 복음의 관계성 속에서 설명함으로 갈라디아서 2장의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한 바울의 가르침과 일치시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무공로성 곧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도성이 그의 사상의 근간을 이룬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내적으로 체험한다고 함으로 갈라디아서에서 갈라디아 공동체를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부르셨고 또 성령으로 시작했다는 바울의 관점과 일치하게 된다.
김종이 목사 / 성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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