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55:3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을 지나치시리만치 사랑하셨던 하나님은 다윗에게 “확실한 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한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게 확실하시답니다.
사람들도 보면 매사에 확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확실하게 합니다. 두 번 잔소리 할 필요가 없게 깔끔하게 일처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시원해서 좋습니다. 지켜보는 사람들마저 덩달아서 신이 나게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찜찜합니다. 확실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일어나 돈 관계를 처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은 대개의 경우, 모든 일을 그런 식으로 하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모든 일을 확실하게 하는 스타일입니까? 정확하게 분명합니까? 좀 표현이 지나쳤습니까? 칼 메닝거의 표현을 빌리면 “사실보다 중요한 게 태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대강 주시지 않습니다. 기왕에 주실 것이라면 분명하고 확실하게 주십니다. 그러한 은혜를 받으려면 우리 또한 확실한 믿음의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아무에게나 은혜를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확실함”의 반대말은 “애매함”과 “모호함”입니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애매모호”가 됩니다. 어떤 이는 말하는게 애매합니다. 말을 할 때 우물우물하면 불분명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알 듯 말 듯 합니다. 그러면 참된 교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이던지 사람과의 교제든지 어떤 사람은 태도가 애매합니다. 이런 사람은 우물쭈물합니다.
단호한 태도가 없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긴가민가합니다. 그래서 되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러면 모두가 힘들어집니다. 애매한 태도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고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게 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애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릅니다. 믿는 것도 아니고 안믿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런 이들의 공통점은 성경이 미적지근하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3:15~16에 나오는 라오디게아교회를 닮은 사람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주님께 책망을 받은 교회입니다. 그 이유는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해서 주님의 입에서 토해 내겠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토해냄의 대상이 될만한 모습은 없습니다. 우리교회가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확실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위로와 격려의 서신”으로 불리는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는 박해와 환난을 당하는 성도를 향해 “우리의 확실한 믿음은 금보다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 앞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벧전1:7). 확실한 믿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