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사람이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아직 오시지 않으신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요, 도덕법을 통해 또는 전통이나 서원기도를 통해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할 때도 은혜에서 떨어져 가장 깊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라 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율법과 복음, 율법과 은혜, 율법과 믿음, 율법과 그리스도간의 구별을 반대의 개념으로 분명하게 이분법적으로 이해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의 논점을 다루는 앞부분에서 두 가지 짝 개념들을 설명한다. 먼저 ‘정치적 의,’ ‘시민적 의,’ ‘모세가 가르치고 있는 율법의 의,’ ‘십계명의 의’ 그리고 ‘능동적인 의’에 대항해 ‘이 모든 것들보다 뛰어난 믿음의 의,’ ‘기독교적의’ 그리고 ‘수동적인 의’를 대조시켰다. 루터의 이러한 신학은 믿음과 삶이 이분화되어 있고 사회, 윤리적 가르침을 등한히 하는 경향성을 띠고 공동체나 사회적 참여로부터 분리된 개인중심적인 경건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1535년 갈라디아서 강해를 중심으로 루터의 믿음과 사랑의 개념을 이해하려는 노력들이 시도 되고 있다. 루터의 신학이 사랑에 대한 가르침의 결핍으로 인해 그의 신학이 불가피하게 도덕성을 손상시키며, 도덕적 태만 혹은 사회, 윤리적 책임의 방기를 야기한다는 비판의 형태로까지 나타났다고 믿는데 이는 루터의 ‘이신칭의론’을 너무 일방적으로 강조하면서 그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간과하거나 주류적 연구 분야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종교개혁시대에 다양한 진영에 대항하여 종교개혁의 핵심진리를 변호해야 하는 루터의 논쟁적 상황은 인간의 ‘하나님 사랑’이라는 신학적 주요 주제가 루터의 진술들 속에서 표면화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루터의 대(大) 갈라디아서 주석에 대한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 완전히 배제되거나 또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루터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첫 부분에서는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다가 후반부에서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여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바울서신의 구조를 이용해서,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의 상황 속에서 논쟁거리가 된 바로 자신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개념을 명료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루터는 갈라디아서가 4장 8절에서 9절을 중심으로 해 구조적으로 두 개의 큰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바울이 이 서신의 전반부에서는 믿음,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의, 그리고 칭의를 가르치고 있는 반면에, 후반부에서는 사랑, 율법의 행위, 그리고 성화를 가르치고 있다고 해석했다. 갈라디아서 5장 12절에 가서 루터는 다시 한 번 바울의 논지의 전환을 주시하면서 믿음과 덕행이라는 두 개의 큰 주제에 의해 갈라디아서가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즉 루터는 갈라디아서 강해를 통해 믿음과 사랑의 이해를 위한 해석의 틀 중, 첫 차원은 믿음과 사랑의 대립관계를 기술하고 있는 반면, 두 번째 차원에서는 믿음과 사랑의 상호 조화로운 관계를 구별되기는 하지만 뗄 수 없는 관계로 설명했다.
루터는 ‘수동적의’와 거룩함의 차원에서는 믿음과 사랑이 상호 대립적 관계에 놓여 있고 여기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중요하다고 봤다. 반면에 ‘능동적 의’와 거룩함의 차원에서는 믿음과 사랑이 서로 조화되고 양립되는 것으로 봤다. 루터는 이와 같이 그의 가장 성숙한 신학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1535년 갈라디아서 강해에서 믿음과 사랑을 지배적인 한 쌍의 주제로 사용했고, 스스로 그 해석의 틀을 제공했으며, 더 나아가 이 한 쌍의 주제가 그의 신학 전체에서 차지하는 핵심적 역할을 암시하고 있다고 본다.
루터는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대한 주석에서 ‘대 갈라디아서 주석’의 중심 질문인 ‘율법의 진정한 행함’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었다. 즉 행함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성령을 받은 후 율법 안에 기록된 것들을 행하는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 사랑과 함께 성령의 힘을 통해 가능케 되는, 그리스도의 선한 행함의 내용을 총체화하는 개념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의 생성은 성령과 직결되어 복음-믿음-성령-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생성의 내적관계를 이룬다고 했다.
루터는 “믿음에게 곧 성령이 수여된다”고 하면서 이것을 사랑의 행위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리하여 믿음을 통해 율법을 준행할 수 있고, 그 전제로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루터는 가톨릭의 행위 구원론에 대항해 행위가 분리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함으로 개인주의적인 구원론과 순종함이 필요 없는 구원관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을 많이 받아 왔었다. 그러나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전반부에서는 믿음을 강조했지만 후반부에서는 사랑의 실천으로 성령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루터는 율법과 복음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에 의한 내적인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강조했다. 성령은 믿음의 확신과 함께 인간의 내면 중심에 새로운 판단과 움직임을 창출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참된 의지적 순종을 가능케 움직임을 창출하며, 이를 통해 인간의 참된 의지적 순종을 가능케 하신다고 했다. 이러한 루터의 견해는 칭의가 법적인 것만 아니라 성령으로 변화되는 것까지를 말하고 있다고 본다.
갈라디아서에서 우리의 구원은 성령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루터의 구원관은 너무 협소한 ‘칭의’의 관점으로만 구원을 설명하려고 한 단점이 있다. 루터가 언급하고 있는 사랑의 실천이란 부분까지 넓게 해석해 성령으로 말미암아 몸의 구속까지 이르는 모든 과정을 구원으로 보아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구원론과 일치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부분은 행위가 필요 없는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의롭게 된 후의 삶은 반드시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이 따르게 된다. 루터는 미약하지만 갈라디아서를 믿음과 사랑이라는 구조로 이해하였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구원론에 눈을 조금 떴다고 볼 수 있겠다.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종말론적 구조 안에 있다. 성령으로 행하게 됨으로 구원의 완성을 향해 달려간다. 이런 의미에 있어 루터의 구원론은 재조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종이 목사 / 성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