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새벽마다 성경의 인물들을 재조명해 보면서 그들의 면면을 깨달아가며 나름대로 무언가를 발견하는 기쁨이 매우 큽니다. 대상이 선한 사람이거나 혹은 정반대의 사람일지라도 그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보여 주시는 것을 알아가는 재미가 무척 큽니다.
요즘 유다 왕국의 왕들의 기록을 읽고 묵상하면서 더욱 그러한 즐거움을 누립니다. 시인 안도현 씨는 “시인은 발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발견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눈에 번쩍 띄는 연애의 대상을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바로 그때 시인이 된다”고 말했는데 새벽마다 성서 속의 인물들을 새롭게 만나면서 그들의 삶과 그들이 보여 주는 관계 속에서 발견하는 교훈이 의미가 있습니다.
역대하 25:5~16은 아마샤가 에돔과 전쟁을 하려고 군사를 모으는 것과 그것을 지적하고 막는 하나님의 사람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아마샤가 유다의 군사를 징집하고도 부족하니까 북왕국 이스라엘의 군사 10만명을 은 100달란트를 주고 용병으로 사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이라고 하나님의 사람은 아마샤 왕에게 충고합니다(6~7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는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나 민족이 있고 또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복중의 복이고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로망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함께 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고전10:31)이고 다른 하나는 “살든지 죽든지 우리에게서 주님만이 존귀케 되는 것”입니다(빌1:20). 이런 마음과 태도라면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보다 소소한 몇 가지 함께 하는 것으로 만족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안타깝고 아쉽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능히 돕기도 하시고 패하게도 하십니다”라고 아마샤를 설득합니다(8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듯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과 가정과 교회, 나라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아마샤는 이미 거금을 주고 군사를 고용했는데 아깝지 않느냐는 투로 말하자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그것보다 능히 더 많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타이릅니다(9절). 그러자 그 말을 듣고 아마샤가 이스라엘에서 온 용병들을 자기네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아마샤는 처음엔 핑계를 댔지만 결국은 마지 못해 순종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전에 타협하고 계산부터 할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조건적이고도 전적인 순종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거래하기 십상입니다. 즉, 내가 이렇게 하면 뭐를 해주시겠느냐라든지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면 내가 어떤 봉사를 하거나 드리겠다고 하는 행위 같은 것으로 거래합니다.
아마샤는 억지 순종을 하고 에돔과의 전쟁에 나가 큰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무찌르고 정복한 이방의 신들을 가져와서 자기의 신으로 세우고 그것 앞에 경배하며 분향했습니다(14절). 이것은 말도 안되는 행동입니다. 그것을 본 하나님께서 아마샤에게 진노하시고 한 선지자를 보내 경고하셨지만 아마샤는 듣지 않았습니다. 선지자는 아마샤에게 최후통첩을 내립니다. “왕이 이 일을 행하고 나의 경고를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께서 왕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줄 아노라” 우리는 이런 대상이 되지 맙시다. 기왕이면 하나님께서 복과 은혜, 사랑을 주시기로 작정한 사람과 가정,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김형윤 목사 / 서울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