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나이에 집을 나섰습니다. 남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할 시기에 저는 집을 나갔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있어 봐야 고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자식이 자랑스러울 것도 없고, 교회의 수많은 눈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였습니다. 관리집사 둘째 아들의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됐습니다. 전라북도 전주, 지금은 한옥마을로 조성돼 있는 교동이라는 곳은 제법 오래된 집들이 즐비해 있는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외가 친척들이 아직 좀 계신다는 것이 부모님께서 저를 놓아주신 큰 이유기도 했던 곳입니다. 볼품없는 노목이 가득한 채 동네 어귀를 휘돌아 위치한 작은 언덕이 있고 군데군데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가 있어 밤이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습니다. 한 달에 3만 원짜리 작은 방은 연탄창고를 치운 볼품없는 공간이었고, 식수를 비롯해 씻을 수 있는 물은 집 앞의 우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끼니는, 시간이 아니라 배가 고프면 해결했습니다.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서 15분 정도 대로까지 걸어 내려가면 900원에 칼국수 한 그릇을 할 수 있었고, 돌아오는 길에 전주공업전문대학교에 들어가면 형들과 축구며 농구며 어울려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취방 살림이라곤 기타 한 대와 라디오 한 대뿐이었습니
은퇴하신 목사님 사모님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은목교회가 있는데 수요일 예배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점심식사를 대접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요예배에도 45명 정도의 목사님 사모님들이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가까운 식당에서 식사하고 교제하면서 은퇴 후의 삶에 대한 이런저런 애환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원로 목사님으로 교회에서 예우를 받으시는 목사님이나 교단 연금을 받으시는 목사님들은 경제적으로 조금 여유롭게 사시지만 원로 목사님이 아닌 은퇴 목사님은 경제적으로 좀 어렵게 생활하시는 목사님도 있고 배우자가 먼저 천국 가신 목사님이나 사모님은 집에 가도 대화할 사람도 없이 혼자라는 마음의 외로움도 크지만 정부에서 주는 기초연금과 자녀들의 도움으로 생활하는 분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시는 분들도 있다고 합니다. 은목교회를 찾아와서 말씀을 전해주고 식사 대접 해주어서 너무 고맙다고 하시며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면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도 다 은퇴할 날이 올 텐데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은퇴를 할 때까지 목회를 잘 마치신 목사님 사모님들은 행복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드는 안타까운 일들도 있습니다. 아직 한
천안교도소에 근무할 때 일이다. 이곳은 소년 수용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들은 죄를 짓고 들어온 젊은이들이지만 어떤 수용자는 탤런트처럼 외모가 준수하고 예의도 바른 젊은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아들처럼 정감이 가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한번은 상담 요청이 들어와 한 수용자를 만난 적이 있다. 이유를 알아보니 다른 수용자가 왕따를 시킨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수용자는 자기밖에 모르는 극히 이기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밥을 먹을때도, 잠을 잘 때도, 청소를 할 때도, 항상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아이였다. 나는 이미 그런 그가 기독교신자이며 기독교 집회도 나오는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너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야단을 쳐보기도 하고 때론 잘 권면하기도 해 보고 두손을 잡고 기도도 해주곤 했다. 그럼에도 막무가내다.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꽉 막혀있는 이 수용자에게 성가대에 들어와 하나님을 찬양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의외로 고개를 끄덕인다. 성가대가 조직된 지 불과 몇 달도 채, 되지 않았고 성가대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전 세계가 기후 위기에 공감하고 탄소중립을 향하고 있다. 이전의 글로벌 탄소 감축 목표였던 파리협약이나 2030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가 선언적이고 자발적인 목표였다면, 탄소중립은 국가별 순 탄소 배출량을 0으로 설정하는 명확한 목표와 함께 다소의 강제성을 띠는, 실제적 목표라 할 수 있다. 2022년 11월 기준으로 전 세계 탄소의 90%를 배출하는 140여 개 국가가 2050년 전후의 탄소중립을 선언했으며, 특히 탄소배출 1위 중국과 2위 미국이 참여하여 국제적 공조가 기대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지난 6월 22일 ‘2050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제4차 전체 회의 심의를 거쳐 관계부처 합동 ‘제3차 국가 기후 위기 적응 강화대책’을 최종적으로 확정했다. 이번 ‘제3차 국가 기후 위기 적응 강화대책’에는 △기후 감시예측 시스템 과학화 및 대국민 적응정보 접근성 제고 △미래 기후위험을 반영한 사회 인프라 개선 △기후재난 사전 예·경보 강화 및 취약계층에 대한 피해 최소화 △모든 주체가 함께하는 기후 적응 추진 등의 과제가 담겼다. 한화진 환경부 장관은 “심화하는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적 예측을 기반으로 미래 기후위험을 선제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사회
어찌됐건 한 번은 선생님을 면담을 해야 하기에 아버지와 함께 학교로 갔습니다. “아버님, 진혁이는 이렇게 해서 어디도 갈 수 없습니다. 어디 시골에 미달인 실업 고등학교 같은 데라면 모를까….” 그대로 아버지와 학교를 나와 당산역으로 말없이 걸었습니다. 집이 있는 사당역까지 2호선을 타고 11개 역이면 되는데, 아버지는 건너편으로 저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바람 좀 쐬고 들어가자.” “예.” 그렇게 2호선 순환선을 타고 거꾸로 30여 개 넘는 역을 지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그 날도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집이 마치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차라리 때리기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그 중압감을 못 이겨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아빠, 나 전주 내려갈게요. 집에 있기가 싫어요.” “그래, 삼촌들도 그 쪽에 있으니 그게 낫겠다.” 1초도 생각 않으시고 집을 나가겠다는 제 말에 바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아, 아버지가 나를 포기하셨구나. 이제 나는 내놓은 자식이 되는구나. 차라리 잘 됐다. 내 맘대로 살아야겠다.’ 속 시원하긴 해도 섭섭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길로 짐을 싸서 전주로 내려와 3만
무역상인 이응찬은 하나님의 섭리로 존 로스 선교사의 조선어 교사가 됐다. 그러나 당시 조선인이 서양인을 돕는다는 것은 한편으론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거치면서 조선은 서양에 대해 적대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존 로스를 도와주던 이응찬을 다른 조선인들이 관찰사에 고발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역사적인 사실을 알아야 할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 당시 조선을 집권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서학)를 비롯, 서양 세력을 모두 박해하고 배격하는 쇄국정책 다시 말해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를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원래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에 적대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흥선대원군의 부인(여흥 민씨)과 딸들은 천주교(서학)를 믿고 있었다. 특히 부인 여흥 민씨는 매일 천주교의 기도문을 암송하며, 프랑스 신부에게 왕이 된 아들을 위해 감사의 미사를 종종 부탁할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고종을 키웠던 유모도 마르타(Martha)라는 세례명을 가졌던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으며, 흥선대원군 자신도 천주교 신자였던 문신 남종삼(왕족 자제
교회를 개척한 후 아주 가끔씩이라도 한두 사람씩 성도가 늘어나기 시작하지만, 대부분의 개척 교회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기대하는 것만큼 성도 수가 급격하게 늘어나지 않는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 제자리 걸음하는 것처럼 새로운 성도가 오지 않고, 그러한 시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면 목사는 서서히 지치게 된다. 목사만 지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도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한다. 목사의 얼굴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성도들의 모습에서도 활기를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생기를 잃어버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성도의 숫자가 늘어야 한다는 생각에 초점이 맞춰있기 때문이다. 물론 생명력 있는 교회라면 전도가 이뤄져야 하고, 성도의 숫자도 늘어가야 하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이 시대의 상황을 볼 때 개척 교회들이 몸부림을 쳐봐도 교회의 숫자적 성장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 데다가 새로운 교회를 찾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교회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혹여 새로운 교회를 찾기 위해 한 번 방문하였다가도 예배드리는 성도의 숫자가 많이 적은 분위기를 보고는 등록하지 않게 되는 일도 많이 겪
중학교 3학년, 1반 교실에서는 아침부터 선생님께 혼나는 소리가 납니다. “야이 새끼야, 똑바로 앉어. 똑바로.” 삐딱하게 앉아있는 제 정강이를 구둣발로 힘껏 차며 소리를 지르는 분은 담임선생님이십니다. 중학교 1학년 때도 담임이셨는데, 그 때의 착실한 김진혁을 생각하고 부반장이 된 것을 한껏 축하해 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학기 초,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퇴학 위기를 한 번 넘기고 나니, 제 자신부터 학교를 다니기 싫었지만, 담임 선생님 또한 그런 저를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3학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저는 이미 학교를 떠나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공부도, 친구들과의 관계도, 선생님들과의 관계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입 연합고사, 체력장 20점에 총 200만점으로 진행되는 시험에 40점을 맞아 어느 고등학교도 입학하지 못했습니다. 농땡이를 피우지 않고서야, 누구나 20점을 유지 시켜주는 체력장 점수가 10점, 한 줄로만 쭉 찍어도 50점을 맞는 시험점수가 30점이니 고등학교 입학은 이미 물 건너갔습니다. 시험 점수를 받으러 학교에 간 날,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이미 수준을 알고 있는 나는 점수표를 받자마자 미리 아르바이트를 신청해 놓은
마침내 제1기 말경에는 이성봉에 의해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쫒는 기적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속해 있었던 성결교의 4중 복음, 즉 중생, 성결, 신유 그리고 재림을 토대로 한 체험적 신앙의 결과에 의한 것이었음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초기 한국교회는 “성령침례”라는 말을 사용하지도 않고, 또한 미국의 제1기 오순절주의가 말하는 성령침례관과도 다른 점이 있었지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방언과 신유가 나타나는 등 현상적인 면에서는 서로 유사한 성격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게 됐다. 그러다가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에 의해 은사 운동인 제2기의 신오순절주의 성향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오랄 로버츠(Oral Roverts)의 신앙적 강조점인 긍정적인 사고와 치유사역을 수용하고, 성령침례를 통한 축복, 곧 영혼의 축복, 범사의 축복 그리고 건강의 축복을 강조했음을 볼 수 있었다. 현재는 한국교회에 “와그너리더십연구소”가 설립돼 제3의 물결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들은 제1~2기가 강조한 “성령침례” 대신에 “성령충만”을 강조했지만 오늘날에도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있다는 잘못된 직제문제를 주장함으로써 교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1997년, 21살 나이에 한국침례신학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2월이면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기숙사 방배정을 받았습니다. 4명 정원의 제법 큰 방에 방장 또는 각별한 객원식구로 현 강남중앙침례교회 최병락 목사와 전주교회 김요한 목사, 울산 낮은담교회 김관성 목사, 부산신평교회 임진만 목사, 김천은혜드림교회 최인선 목사와 더불어 살 부비며 살게 됐습니다. 금, 토요일이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이 사역지로 떠났다가 주일 늦은 밤이 되면 기숙사로 쏟아져 들어오곤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20~30만원 사이의 사례비를 받아 든 전도사 형님들이 방식구 먹인다고 치킨에 탕수육, 뽀글이라면까지 한 턱 시원하게 쏘면서 개 교회 사역 이야기를 풀곤 했습니다. 그 시절, 주말마다 근사하게 양복을 입고 사례비를 받아 한 두명도 아닌 동생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 먹이는 형님들이 너무 멋져 보였습니다. 저는 도저히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유복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어려움 모르고 자라 늘 웃는 그런 신사들 같았습니다. 평소 친한 옆방 식구들까지 모여 통닭과 탕수육을 뜯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진혁아, 니 이야기 좀 해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