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빈번할 뿐 아니라 점점 더 잔혹해 지기 시작한 20세기의 사회 정치적 상황은 예술 분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1, 2차 세계대전은 많은 사람들을 전장으로 내몰았고 음악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술 활동을 접고 끌려 나간 전쟁터에서 전사하기도 하고 운이 좋아 생존하여 돌아온다 하여도 신체의 일부를 잃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개인적 비극은 참 불행한 일이지만 그것을 계기로 괄목할 만한 음악이 만들어 지기도 했었던 것은 황무지에서 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은 일이라 할 수 있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 그런 작품 중에 하나이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어느 젊은이의 오른손을 앗아갔다. 전쟁 중에 오른팔을 잃는 대신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로 고마워해야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피아니스트였고 피아니스트에게 연주할 수 있는 두 손은 또 다른 생명이기에 그에게는 생명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젊은이가 당시 유명한 피아니스트 폴 비트겐슈타인(Paul Wittgenstein, 1887~1961),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동생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애나 워너(Anna Warner)는 일찍이 부모님을 잃었다. 그녀가 어렸을 때 엄마가 세상을 떠났고 변호사였던 아버지마저 몇 년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애나와 언니 수잔(Susan Warner)은 글 쓰는 재능이 뛰어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두 자매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청소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행히 첫 작품으로 발표된 ‘넓고 넓은 세상’(The Wide Wide World, 1850)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후 두 자매는 여러 작품을 내놓았다.찬송 “예수 사랑하심을”이 지어진 동기는 꽤나 흥미롭다. 자매가 함께 지은 소설 ‘세이 앤드 씰’(Say and Seal, 1860)에는 애처로운 장면이 나온다. 소설의 주인공인 주일학교 교사 존 린덴과 그의 약혼자 페이스 데릭은 죽어가는 어린소년 조니 팩스를 방문한다. 걷지도 못할 정도로 병세가 심각해진 어린 조니는 린덴 선생님에게 “노래를 불러주세요”라고 간신히 부탁한다. 숨쉬기조차 힘들어하며 죽어가는 어린 조니를 품에 안은 린덴 선생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준다. 예수님이 날 사랑하시는 걸 알아요.Jesus loves me! This I know,성경이 그렇게 말해주기 때문
바야흐로 10월의 끝자락, 나무마다 가을의 느낌이 붉게 묻어난다. 여성들은 스타킹을 신기 시작했고 나무들은 화려하게 성장(盛裝)한 나날들... 아마도 나이 탓이리라. 세월이 가는 것이 보인다. 시인은 “잘가라 너무도 짧은 우리네 여름이여”라고 했다던가, 변화하는 자연의 정취에 취해 잠시 벤치에 앉아 볼 겨를도 없이 가을이 왔고 그리고 가고 있다. 시간의 빠름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앞으로만 흐르는 것이 인생이요, 세월의 속성일진데 마치 세월의 법칙을 역행이라도 하듯 시간을 원점에 머물게 한 사람들이 있다. Joy Quintet(조이 퀸테트)이다. 소개에 앞서 우선 “Joy”란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기쁨, 환희, 행복? 아마도 이 모든 것의 합산 같은 여성 오중창단이라면 가장 근접하지 않을까? 솔직하고 꾸밈이 없는 기쁨의 노래, 마치 그 어떤 인공 조미료도 쓰지 않은 찬양의 웰빙과도 같은 행복한 노래, 그들은 찬송가, 오직 본질만을 노래한다. ‘...이들 다섯 명은 초등학교 시절 선명회 합창단에서 만나, 10년간 국내, 외에서 음악사절로 활동하며 우정과 사랑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고등학교 시절에 이 중 한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이라 부르는데 가장 적합한 계절이 가을이 아닌가 싶다. 가을은 우리 모두를 시인이 되게 한다. 가을은 삶을 돌아보게 하고 기도하게 한다. 가을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은 곳곳에 울긋불긋 물드는 단풍이다. 단풍의 색깔을 가만히 보면 세상의 그 어떤 물감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색감을 가지고 있다. 단풍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존재의 기간이 안타깝게 짧기 때문이다. 단풍이 드는가 싶으면 어느새 낙엽이 되어 사라지는 단풍은 본체인 나무와의 마지막 이별을 위한 치장인 듯 하다. 겨울을 위해 헌 옷을 벗어 던지는 나무들의 마지막 치장, 그것이 단풍이 아닐까? 나뭇잎들은 조금 있으면 낙엽으로 떨어져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헐벗은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으로 추운 겨울을 나야하지만 그 마지막 이별은 참 예쁘다. 화려한 단풍으로 마지막을 마무리하며 아름답게 이별하는 나무의 몸체와 잎의 모습이 가을을 쓸쓸하게도 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게도 한다. 마지막이기에 더 절실하게 표현되는 아름다운 빛깔의 단풍을 바라보며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소개한다. 항일시인 윤동주선생의 유작인 “서시”에 작곡가 이용주씨는 자신의 음악언어를 통해 선율을 덧입혔다. 음악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새304/통404)작사 · 작곡: 프레드릭 리먼(Frederick. Martin Lehman, 1868-1953) 편곡: 클라우디아 메이스(Claudia Lehman Mays, 1892-1973)독일에서 태어난 프레드릭 리먼은 4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어릴 적부터 주일학교를 다니던 리먼은 11살 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순탄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노스웨스턴 대학을 졸업하고 침례교 목사가 되어 오듀본(Audubon)의 시골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리먼 목사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일생동안 여러 지방의 시골 교회를 섬겼다.리먼 목사는 목회를 하는 교회마다 형편이 너무 어려워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역을 하면서 할 수 없이 또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그는 가구점에서 목공으로 또는 공장에서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육신이 너무 힘들 때면 목회지를 도시로 옮겨 편안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리먼 목사는 끝까지 작은 시골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질수 있는 십자가라고 생각하며 달게 받았다.어느 날 시골 교회를 맡아 사역을 하던 때, 그 날도 리먼 목사
그렇게 뜨겁던 여름이 정말 홀연히 물러가고 가을바람이 적당히 시원한 기분 좋은 느낌으로 뺨을 스친다. 가을이 오면 누구나 조금은 감상적이고 또 조금은 자기반성을 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파란 가을 하늘, 청명한 가을바람과 함께하는 이 가을에 마음을 편안하게 정화할 수 있는 음악이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이다. 가을을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음악으로 멘델스존(Jo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년~1847)의 피아노 음악인 무언가(Songs without words)를 소개한다. 무언가, 문자 그대로 가사가 없는 노래로 피아노의 소리만으로 모든 감정과 생각을 노래하는 음악이다. 사람의 육성으로 가사를 전달하는 노래들은 뜻과 의미는 분명하게 전달 할 수 있으나 그 이상의 감성을 자극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음악은 말이 없어도 말보다 훨씬 강력하게 감정을 전달 할 수 있는 영혼의 언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멘델스존의 작품을 들어보면 왜 작곡자가 이런 제목을 붙였는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음악이 주는 감성의 깊이가 깊다는 뜻이다. 독일의 작곡가 멘델스존이 21세 되던 1830년부터 평생을
창공이 열리고 수천 개의 트럼펫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며 휘날리는 구름 속 천지 사방이 어둠속에 갇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무덤이 깨어지고 묻혀있던 앙상한 뼈들이 일어나며 삶과 죽음의 경계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것은 바로 그 날, 진노의 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최후의 심판과 승리의 거룩한 도성이 도래하는 날. 기독교의 교리를 성경에 쓰여 진 문자 그대로 마음에 새긴 자들이라면, 경중에 차이는 있겠으나, 다들 나름대로의 종말론을 품고 산다. 필자도 어린 시절엔 심각한 꼬마 종말론자였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리웠을 때, 태풍전야의 고요함이 창문 앞 까지 엄습했을 때, 광풍 속 나뭇가지 들이 미친 듯이 휘날릴 때, 나는 언제나 은근한 두려움 속에 기대하곤 했었다. “오늘이 그날인가?” 물론 이제 필자는 예수의 재림을 더 이상 감각으로 느끼며 기대하던 꼬마 종말론자는 아니다. 성장함에 따라 그 날은 결코 예측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시간이란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가끔은 창공이 열리며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높은 보좌 위에 앉으신 주님이 드러나시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님을 뵙기를 사모함에는 변
한국전쟁 종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가 있었던 7월이었다. 방송 매체를 통해 낯선 나라에 와서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살리고 그들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자신의 젊음과 생명까지도 기꺼이 나누어 준 많은 사람들의 사연들을 전해들을 수도 있었던 기회였다. 또한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고 그 소중한 희생으로 산 오늘을 감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인류 역사는 많은 전쟁들을 기록하고 있다. 예술사를 살펴보면 이런 전쟁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예술 작품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에서 문학과 음악 분야가 가장 많은 산물을 창조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작곡가들은 다양한 기법으로 전쟁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를 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전쟁은 인간에게 두렵고 충격적인 경험이며 감정의 깊은 곳에 영향을 주는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피아노 작품에서 전쟁 소나타라고 분류되는 프로코피에프의 작품들이 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Sergei Prokofiev, 1891-1953)는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지만 스탈린의 공산체제에서 많은 정치적 압박을 받았던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그토록 싫어했던 체제의 독재자 스탈린과 같은 날 세상을
해마다 여름이 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장마기간이 아닐까? 장마와 함께 태풍도 오고 또 겨우 장마철을 무사히 지났다 싶으면 불볕더위와 씨름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통과해야 곡식이 영글고 과일이 잘 익어 가을의 수확을 풍성하게 한다는 자연의 이치와 보상을 기대하며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이유 없는 어려움이 아니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려움 뒤에는 항상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의 법칙에 감사할 수 있다. 그런 감사함으로 장마기간을 잘 통과하고 여름을 거뜬히 이겨야겠지만 그래도 가끔씩 마음이 눅눅해지는 때가 있기도 하니까 그럴 때 젖은 마음을 보송보송하게 말려줄 수 있는 마음의 제습기가 필요한 기간이다. 젖은 마음을 닦아낼 수 있는 음악을 생각해 보다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의 폭풍(Tempest)이라는 피아노 작품을 떠올렸다. 피아노 음악의 신약성서라고도 불릴 만큼 위대한 작품인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는 32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 17번째의 작품이 바로 폭풍 소나타이다. 이 작품을 처음 대한 지인이 베토벤에게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작곡했느냐는 질문을
5월은 일년중 가족을 중심으로 생활하기 가장 적합한 한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 등 내 곁에 존재하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감사하고 행복해 하며 또 축하하는 그런 날들이 모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가족하면 단순하게 피를 나눈 혈연관계, 혹은 직계에만 국한하기 쉽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신뢰와 존경, 그리고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관계가 형성될 때가 있다.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그래도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요, 축복 받은 인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관계는 같은 울타리 안에서, 피를 나누고 성씨를 공유하는 것 보다 더 깊은 가족 같은 관계이지만 그리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또 다른 가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분명 축복이며 은총이다. 제 2의 가족 관계를 가장 쉽게 형성할 수 있는 직업이 있다면 아마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직업군이 아닐까? 필자 역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명을 가지고 살면서 나의 제 2의 가족은 제자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생물학 적인 관계는 없지만 진심을 소통할 수 있는 나의 학생들은 분명 매우 중요한 존재, 즉 significant being인 것이다. 그들을 통해
요한 세바스천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하면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음악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작곡가이다. 신실한 신앙의 사람이었던 바흐는 교회음악의 대가이며 음악을 통한 신앙과 신학을 표현한 인물로 기독교 예술과 문화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삶 전체가 음악과 예배였다고 할 만큼 부지런한 바흐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이것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달란트를 허비하지 않고자 하는 믿음에서 출발한 성실함이었다. 그러나 생전의 바흐는 내면을 채우는 일에는 뛰어났지만 사람들에게 자신을 포장하고 나타내는 일에는 관심도 없었고 재주도 없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그의 업적에 비해 유명세는 그리 타지 않았던 작곡가였고 그 결과로 사후에는 점점 그의 음악이 잊혀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흐 사후 약 80년 동안 그의 교회음악은 그리 많이 연주되지 않았고 전문 음악가들 외에 일반인들에게 바흐와 그의 음악은 생소해 지기 시작했다. 바흐는 b단조 미사를 비롯한 많은 교회칸타타 등 다양한 교회음악을 작곡했는데 그중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난을 음악으로 표현한 수난곡은 바흐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만큼 깊은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사
살다보면 사람의 힘으로는 버거운 일들을 만날 때가 있다. 그 버거움을 견뎌내는 것이 성도를 향한 주님의 기대라는 생각으로 노력하면서도 가끔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초자연적인 기적을 바라며 간구하고 싶을 때도 있다. 어느 순간, 초자연적인 표적으로 나의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것이 나의 바람대로 다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허황된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힘든 순간에 기적을 바라는 것은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 삶속에서 그 어느 것인들 기적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기적은 우리 가까이에도 많이 있다. 예컨대 성인의 심장은 10만3,689번을 뛰고 피는 2억6,880만㎞를 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2만3천40번의 숨을 쉬며 750개의 근육들은 빠르게 혹은 천천히 필요에 따라 오차 없이 움직인다. 우리의 머리카락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0.01714인치가 자라고 있고 700만 개의 뇌세포가 움직인다고 한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해도 매순간 생명의 연장을 위해 우리의 인체에서 일어나는 경이로운 많은 일들을 기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교
새해 달력의 첫 장을 걸며 설레였던 일이 어제만 같은데 벌서 1월이 다 가고 있다. 빠른 시간의 흐름 앞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시기가 1월의 끝, 또 다른 시작의 마무리를 할 때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지난 1월, 새해를 맞이하면서 가졌던 소망과 다짐,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한 해에 대한 기대로 설레고 떨리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때의 초심을 아직도 간직하고 그때 다짐한대로 아직도 성실하게 살고 있는가를 되묻기도 하는 새해 첫 달의 마지막 시기, 그래서 조금은 부끄럽고 또 그래서 조금은 조급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올해에도, 또 내년에도 매해마다 새해가 되면 소망과 다짐의 시작을 하게 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한 달의 끝에서도 여전히 처음 시작할 때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끝을 위한 기초는 처음 가졌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음악 중에서도 특별히 오페라의 서곡들은 아름다운 결론을 위해 꼭 필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은 부분이다. 언뜻 생각하면 서곡은 본론을 예고하고 주위를 집중시킬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작은 부분인 듯 하지만 이 서곡이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오페라에 집중하지
성도의 삶에서 성탄절만큼 설레고 기쁜 절기는 없을 것 같다. 주님의 오심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오직 한길이며 나 자신이 구원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약속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탄절은 늘 감격으로 준비하고 감사로 맞이해야 한다. 유난히 눈이 많고 추운 올해 12월도 마음만은 따뜻한 것은 성탄절을 준비하기 때문일 것이다. 12월은 그래서 성탄 축하 카드를 전할 지인들을 생각하고 만나며 서로에게 선물 같은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한 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고유 명절인 추석 덕담 중에 더도 말고 덜도 많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인사가 있다. 그러나 성도들의 안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성탄절만큼만 넉넉하고 행복하고 은혜에 감사하는 매일이 되고자 하는 것이지 않을까? 성탄절은 또 음악이 풍성한 절기이기도 하다. “음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란 마티 루터의 말처럼 음악만큼 인간의 많은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며 동시에 아름다움을 통한 감동을 전할 수 있는 매체는 그리 흔하지 않다. 실제로 클래식 음악에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감사와 감격을 아름답게 담아낸 음악들이 많이 있다.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 1
2012년 여름은 참으로 더웠습니다. 때로는 사정없이 쏟아지는 뜨거운 열기가 마치 진원지를 알 수 없는 독가스처럼 살인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더위도 위협적일 수 있을까요? 그럼요. 노인들에게 더 위험한 건 추위보다 더위랍니다. 사랑하는 침례교 형제, 자매 여러분, 내년 여름을 위해 미리 알려 드리죠. 음악 속의 이열치열법입니다. 우선 심각한 음악은 안 되겠고, 서정적인 여성의 목소리 보다 열정과 낭만을 갖춘 남성의 목소리, 역시 더위엔 시원한 테너의 음성이 최고입니다. 그리고 이열치열이라, 태양과 정열을 얘기하는 음악이면 더욱 안성맞춤이겠지요. 그래서 떠올린 곡이 바로 해양으로 둘러싸인 태양의 나라 이탈리아의 네아폴리탄 가곡들(Neapolitan Songs), 소위 나폴리 민요라 불리는 노래들입니다.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는 곳, 시원한 바람이 키 큰 나무들 사이로 너그럽게 불어오고, 덥지만 습하지 않은 곳, 바로 나폴리의 음악입니다. 대부분의 나폴리 가곡들은 선율이 경쾌하고 화려한 것이 특징입니다. 강렬한 태양을 노래하고 금싸라기 같은 해변을 찬미합니다. 활기와 낭만이 넘치는 항구와 열정과 변덕스러움이 술렁이는 도시를 노래합니다. 물론 찬란한 연인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