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키에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아이작 와츠는 그의 아름다운 시를 읽고 찾아온 엘리자베스 싱어(Elizabeth Singer)를 사랑하게 됐다. 와츠는 37세에 열렬히 사랑하는 싱어 양에게 청혼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거절당하고 말았다. 실망한 그는 결혼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려버렸다. 세상의 사랑에는 실패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그는 “세상은 허무하도다. 불공평하지만 공평하도다”라고 자신의 푸념 섞인 속마음을 짧게 적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는 ‘마크 레인 교회’의 사역에 더욱 매달렸다. 와츠 목사의 마음이 많이 상해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런던시장 토마스 애브니(Thomas Abney) 부부는 축 처져 있는 그를 런던 교외의 저택으로 초대했다. 그를 일주일정도 푹 쉬게 하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저택에 머물면서 애브니 부부의 세 딸들과 정이 든 와츠는 어린 딸들을 위해 “바쁜 아기 꿀벌”과 “멍멍 짖고 물어대는 강아지”라는 시와 다음과 같은 자장가를 써주었다. “쉿! 아가야 곤히 자거라. 거룩한 천사들이 네 침대를 지켜준단다.(Hush! my dear, lie still and slumber; Holy angels guard th
레지날드 히버(Reginald Heber)는 영국의 조용한 마을 호드넷(Hodnet)을 좋아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옥스퍼드 대학 학위를 가진 이 성공회 목회자는 런던의 저택에 살아도 괜찮을 만큼 넉넉했다. 하지만 히버는 시골 호드넷에서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가진 것을 나누며 작은 교회를 섬기길 원했다. 시골의 환경은 그가 조용히 글과 찬송을 쓰기에 참 좋았다. 그는 그렇게 직접 지은 찬송들을 특별한 예배가 있을 때마다 교인들과 함께 불렀다. 그러던 히버가 성공회 주교로 취임하게 됐다. 윗사람들은 그가 인도의 캘커타(Calcutta) 지역을 맡아 떠나기를 원했다. 히버는 정든 호드넷을 떠나기 싫었지만 사역자는 병사처럼 윗사람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인도로 사역지를 옮겼다. 3년간 사역에 전념하던 그는 1826년 4월 3일 43세였을 때 인도의 티루치라팔리(Tiruchirappalli)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예배를 인도했다. 그날따라 날씨가 너무 더워 그는 예배를 마친 후 물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만 예기치 않게 익사하고 말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그의 아내는 남편의 낡은 가방에서 종이 한 뭉치를 발견했다. 그가 오래전에 예배를 위
현 시대를 나타내는 많은 현상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 중 하나가 스피드, 즉 빠름이다. 삶의 많은 부분들이 자동화되면서 일상이 빨라짐에 따라 변화의 속도 또한 빠르다. 시대의 흐름이 빨라지면서 현재를 표현하는 유행이나 성향의 변화도 정신없이 빨라졌다. 그러다보니 삶의 편리함은 향상 됐을찌라도 삶의 질이 나아졌다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일상에서의 진지함이 답답함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원칙을 위한 엄격함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삶은 빠른 변화와 신속한 적응으로만 충족될 수 없는 것이기에 현대인들은 공해해지고 외로워지는 것 같다. 진지함이나 엄격함과 같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아니 잊고 싶어 했던 가치들은 역설적으로는 삶을 살만하게 하는 소중한 가치요 기준일 수 있다. 아마도 낭만시대의 기독교 작곡가였던 멘델스존(1809~1847)은 이런 삶의 가치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피아노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이 바로 엄격 변주곡인데 이 작품의 제목만 보더라도 멘델스존이 추구했던 가치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주제와 17개의 변주로 이뤄져 있는데 1841년에 작곡된 것으로 멘델스존이 가
시빌라 마틴(Civilla Martin) 여사는 캐나다 노바스코샤 출신으로 대학에서 음악을 공부한 후 학생들을 가르쳤다. 몇 년 후 하버드대학 출신인 월터 마틴(Walter Martin) 목사를 만나 결혼하고 남편을 도와 전도에 힘쓰며 틈틈이 글을 쓰는데 시간을 보냈다. 마틴 목사 부부는 9살 난 아들과 함께 몇 주간 뉴욕의 한 성경학교를 방문하고 있었다. 찬송가집을 만들고 있는 성경학교 교장인 데이비스를 돕기 위해서였다. 어느 주일 저녁 마틴 목사는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교회에서 설교를 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그런데 부인 시빌라가 갑자기 아프게 돼 그는 아내를 돌봐야만 했다. 고민 끝에 하는 수없이 설교를 할 수 없어 죄송하다고 연락하려는 참이었다. 그 때 어린 아들이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아빠가 오늘 밤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빠가 안 계신 동안 하나님이 엄마를 지켜 주실 거예요. 그렇지 않겠어요?” 그 말에 감동이 된 마틴 목사는 어린 아들의 믿음을 대견스럽게 생각하며 평안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교회로 향했다. 그 날 예배의 설교시간에는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 모두 평소보다 훨씬 큰 은혜를 체험했다. 병상에 누워있던 마
드디어 독일 30년 전쟁이 끝을 맺었다. 총소리와 대포소리는 멈추었지만 전쟁이 남기고 간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다. 도시는 폐허가 되어있었다. 사람들에겐 당장 살아갈 곳조차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전쟁이 남긴 가장 큰 상처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친구들과 가족들의 죽음이었다. 1,600만 명이던 인구는 절반 이상이 사망하고 600만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흑사병으로 고통을 당하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걸려 죽어갔다. 아버지의 목회를 돕다가 루터교 목사가 된 베냐민 슈몰크(Benjamin Schmolck)는 전쟁 이후의 사역으로 가장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슈몰크 목사 부부는 눈을 뜨자마자 성도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들의 상한 몸과 마음을 달래는 것이 시급했다. 32세 된 젊은 슈몰크 목사는 아내와 함께 그날따라 조금 먼 곳으로 심방을 나갔다. 그들의 방문은 상처 입은 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됐다. 여러 곳을 들르고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저기 멀리 집이 보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연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설마하며 재빨리 집으로 뛰어가 봤다. 사택은 이미 홀랑 타
칼 보버그(Carl Boberg)는 배를 만드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소개로 여러 해 동안 선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중 19세에 주님을 영접하고 갑자기 사역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신학공부를 마친 그는 고향에서 문서전도 활동을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주간지 ‘진리의 증인’(Witness of the Truth)의 편집자로 글을 썼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수년간 스웨덴의회 상원의원으로도 일했다. 보버그는 많은 찬송을 썼고 후에 ‘스웨덴 복음전도 언약교회’의 찬송집을 편집하기도 했다. 보버그 목사가 26세에 스웨덴 남동부 해안의 시골을 방문했을 때였다. 갑작스런 천둥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 내렸다. 그리고 비가 갠 뒤의 풍경은 헤아릴 수 없이 아름다웠다. 숲속의 새들이 크고 작게 지저귀는 노래가 천상의 피리 소리처럼 메아리쳐 울렸다. 발 앞에 놓인 옥색 강물이 바람 따라 퍼지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듯 했다. 우주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듯 보버그 목사는 소리쳤다. 이렇게 경이롭고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터져 나온 탄성이 바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이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볼 때 하늘의 별 울려…
기억을 추억으로 고이 접어 마음 깊이 넣어두며 다시 한 번 시간과의 이별을 하는 시기가 왔다. 2017년의 마지막 달력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경험은 이맘때쯤이면 누구나 한번 쯤 하게 되는 연중행사 같은 것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정말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한반도는 그 어느 때보다 격동의 시기를 지나왔고 급기야 땅마저 요동치며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일도 겪으며 그 상처가 치유되기도 전에 시간은 야속하게 우리를 떠나려고 한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그리 큰 지진이 아니라고 하는 강도에도 유리가 깨어지고 땅이 갈라지는 모습에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연약함을 다시 깨달으며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무엇이 중요한가?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안지를 마련하는 것이 송년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우리들의 과제인 듯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데 온 정신과 관심을 쏟아온 것 같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되어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 동의하지 않고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자신의 목적과 이익
주 예수 이름 높이어(새36/통36) 작사: 에드워드 페로넷 (Edward Perronet, 1726~1792) 편집: 존 립폰(John Rippon, 1751~1836) 작곡: 올리버 홀든 (Oliver Holden, 1765?1844) 아마추어 작곡가 올리버 홀든(Oliver Holden)은 목수였다. 그는 일을 하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가 떠오르면 잠시 톱을 내려놓고 악보에 적어 놓았다. 홀든은 전문적인 음악수업을 받지 않았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멜로디를 만들었다. 하루는 홀든이 공장에 나타나질 않았다. 궁금히 여긴 친구들이 홀든을 찾아갔을 때, 그는 집안에서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날 홀든은 출근도 하지 않고 마음에 가지고 있던 노래를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오선지에 적고 있었던 것이다. 28세가 되던 해 홀든은 목수 일을 그만두고 부동산 중개업에 뛰어들었다. 입법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나중엔 악기 상점을 차렸다. 손을 대는 사업마다 번창했지만 홀든은 어려서부터 음악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아메리칸 하모니̓(1793)를 비롯해 여러 권의 찬송가책을 출판
사계절이 비교적 뚜렷한 기후를 가진 것은 우리가 누리는 축복 중 하나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변화하는 자연을 보며 그에 맞는 일들을 하며 살 수 있는 것은 분명 삶 속에서 또 다른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임에 틀림없는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감사를 잊고 살아간다. 특히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기도 해서 햅쌀이며 과일이며 풍성한 먹을거리가 있고 높고 파란 하늘 아래 갖가지 빛깔로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다. 그뿐이랴? 그렇게 예뻤던 단풍이 낙엽이 되어 떨어져있는 거리조차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운 계절이 가을이다. 이런 다양한 축복을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고스란히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은혜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절 또한 가을이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더 많은 생각을 더 깊게 하게 되는 것 같다. 올 가을도 어김없이 우리에게 찾아왔고 또 넘치는 혜택을 남기고 떠나가고 있다. 고마운 가을을 보내 주는데는 쇼팽의 음악만한 것도 없을 것이다. 19세기 혼란한 폴란드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오로지 피아노를 위한 음악만을 작곡한 쇼팽(Fryderyk Franciszek Chopin, 18
샘물과 같은 보혈은(새258/통190) 작사: 윌리엄 쿠퍼 (William Cowper, 1731-1800) 원곡: 미국 전통 민요 편곡: 로웰 메이슨 (Lowell Mason, 1792-1872) 윌리엄 쿠퍼(William Cowper)는 영국의 그레이트 버크햄스테드(Great Berkhamstead)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직자였고 어머니는 왕족 출신이었다. 쿠퍼는 허약한 몸과 소심한 성격 탓에 사회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법률을 공부했지만 심한 우울증과 무대 공포증이 있어서 법정에는 한 번도 서보질 못했다. 6살 때 엄마가 돌아가신 것이 그에게 큰 상처로 남아있었다. 약한 체질로 인해 육체의 고통이 심했고 우울증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괴로웠다. 그의 삶은 바람 잘날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영적으로 연약해진 쿠퍼는 이렇게 못난 자신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공포에 빠진 그는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끝내는 네 번이나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하지만 이같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가 성경을 놓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어느 날 성경을 뒤적이고 있을 때 사도 바울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사람이 죄를…
너무도 괴로워하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짓눌려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요? 도대체 어찌해야 하냐고요!” 그녀는 심방을 온 목사님을 향해 계속 울부짖었다. “당신의 모든 시험과 무거운 짐을 우리 주 예수님께 아뢰세요.” 그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엘리샤 호프만(Elisha Hoffman) 목사는 설교를 준비하고 있지 않을 때는 가난한 자를 섬기며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했다. 정이 많은 그는 설교를 유창하게 하지는 못했지만 섬김에 뛰어난 훌륭한 사역자였다. 호프만 목사가 펜실베이니아 레바논 지방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였다. 그곳에서 50킬로미터쯤 떨어진 그의 고향 마을인 오윅스버그(Orwigsburg)에 사는 한 성도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슬픔이 극에 달한 여인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는 말씀으로 위로했다. 하지만 그 여인의 울부짖음은 그칠 줄 몰랐다. 여인은 호프만 목사를 바라보며 계속해서 “어찌해야 하나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하며 소리쳤다. 그 때 호프만 목사는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말했다. “성도
올해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라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연초부터 각종 세미나를 비롯한 많은 기념행사들이 계속되어왔고 10월에는 더 많은 행사들이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황의 면죄부 판매 등 기존 가톨릭교회에 대해 루터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며 교황을 비판했는데 당시 교회의 절대 권력이었던 교황과 그 교황이 행하는 교회의 전통을 비판하는 것은 목숨을 내건 도전이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루터에게는 교황보다 더 큰 권위의 하나님의 말씀이 더 절대적인 권위였고 이것에 대한 확신이 그에게 용기 있는 도전을 감행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어마어마한 위대한 일이 확신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그 믿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절대적 신앙이 루터를 죽음조차 두렵지 않는 투사로 만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변함없다. 그런 믿음의 사람만이 세상을 바꾸고 개혁할 수 있다. 진정한 개혁은 진실된 신앙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개혁을 외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을 던진다고 말한다
티모시 드와이트(Timothy Dwight)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이 있었다. 우연하게 둘은 모두 미국인 목사였고 둘 다 예일대학의 총장을 지냈다. 그 중 한 드와이트는 1795년부터 1817년까지 총장을 맡았고, 다른 드와이트는 1886년부터 1898년까지 총장을 맡아 예일대학을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성장시켰다. 먼저 총장을 지낸 드와이트 총장은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강단에 오를 때마다 한 손에 성경을 들고 갔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영적부흥을 위해 정기적으로 대학부흥회를 열어 학생들의 영성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드와이트는 어려서 천연두를 앓은 데다 이른 새벽마다 촛불을 켜놓고 무리하게 공부한 나머지 시력이 악화되어 30분도 계속해서 책을 읽을 수 없게 됐다. 심각한 시력 장애가 있었지만 그의 다재다능한 활동을 멈추게 할 순 없었다. 드와이트는 이렇게 바쁜 중에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찬송가책을 발행했다. 예일대학 총장이 되자마자 찬송작업을 시작해 1797년에는 와츠의 ‘시와 찬송’을 재편집해 미국교회가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믿음이 돈독했던 드와이트 총장은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신 교
만세 반석 열리니(새494/통188) 작사 : 어거스터스 톱레이디 (Augustus M. Toplady, 1740-1778) 작곡 : 토마스 헤이스팅스 (Thomas Hastings, 1784-1872) 지금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싸움에 큰 관심을 갖지 않지만 예전에는 그 논쟁이 무척 심했다. 칼빈주의를 주장한 톱레이디(Augustus Toplady)와 알미니안주의를 주장한 존 웨슬리(John Wesley)의 논쟁은 격렬했다. 그들은 설교나 저술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폈고 각자의 입장을 강하게 반영하는 찬송을 썼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주셔서 사람은 의지에 의해 구원을 선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고 믿었다. 톱레이디는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구원을 선택하지 못할 만큼 타락했으며, 구원의 대상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런던 소재 프랑스인 교회를 맡고 있던 톱레이디 목사는 ‘가스펠 매거진’(The Gospel Magazine)의 편집인이었다. 톱레이디 목사는 1776년 3월호에 영적 개선과 국가 부채에 대한 기사를 썼다. 엄격한 칼빈주의자인 톱레이디는 웨슬리가
사람의 몸에서 열이 나면 건강 상태가 안 좋다는 첫 번째 신호라는 것은 보편적인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몸에서 일어나는 생존을 위한 씨름으로 인한 열감이라는 의미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구가 뜨거워진다는 것은 그만큼 지구가 병들어 가고 있다는 뜻이고 이에 대한 환경연구가들의 경고는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6월이면 늘 장마로 많은 비가 내렸던 한반도에 언제부터인가 마른장마라는 말이 생기더니 올해는 아예 극심한 가뭄으로 급수를 제한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과학이 발전하고 인공지능으로 많은 것들이 자동화되면서 이제 제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비한방울도 마음대로 오게 할 수 없음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를 제대로 깨닫게 해 주는 여름이다. 피조물의 한계와 약함을 가진 존재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루는 공동체마다 아집과 사욕으로 가득함을 바라볼 때마다 그 모습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오죽하시겠나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포장하지만 속내는 철저히 진영논리에 의한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어 있다. 진실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편법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