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햇빛을 보지 않고 지하에 살면 눈에도 곰팡이가 생긴다. 또 햇볕을 오래 쬐지 않으면 우리 몸속에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이 고갈돼서 우울증이 생긴다. 빛의 사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영광의 빛을, 복음의 빛을 강력히 비추지 못하니까 사회 곳곳에 곰팡이가 생기고 사회 전체에 우울증이 깊어졌다. 세월호 참사의 도덕적인 책임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진정한 책임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있다. 우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책임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중세 귀족들은 평상시에는 대농장의 봉건영주로 생사여탈의 권한을 행사했다. 하지만 전쟁이 나면 자기 아들들을 앞세우고 직접 전쟁터로 나가 전쟁을 지휘하고 평민들을 보호했다. 이것을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했다. ‘가진 자의 책임의식’이라는 뜻 아닌가. 다시 말해서‘권리가 큰 만큼 책임도 크다’는 뜻이다.경주 최 부잣집은 12대 만석꾼을 지낸 집안이다. 지금의 재벌에 해당한다. 그 비결이 뭘까? 그것은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였다. 최 부잣집의 첫 번째 원칙은 “흉년에 가난한 사람의 논을 사지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테」의 「마지막 수업」이란 작품은 우리 교과서에 수록되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쓴 또 다른 작품 「불로 장생주」라는 제목의 작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단편의 내용은 이렇다.프랑스 「프로 몽테르」 수도원에는 가난을 미덕으로 삼는 수도사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창문이 깨져도 유리를 끼우지 못했으며, 종탑은 다 찌그러져 무너졌고, 종이 깨져버렸지만 고칠 돈이 없어서 수도사들이 나무 막대기를 두드려 시간을 알려주기에 이르렀다.그 수도원에 젖소 두 마리를 돌보는 「고세」라는 수도사가 있었다. 가난하고 궁핍한 수도원의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고세」수도사는 수도원 원장을 찾아가 면담하게 됐다.어릴 때 자기를 키워준 양부모가 「불로 장생주」라는 술의 전문가였으며 어깨 너머 배운 것을 기억하면서 6개월간 연구하고 실습한 결과 드디어 그 늙지 않고 오래 산다는 「불로 장생주」를 재현 하는데 성공하게 됐다.이 「불로 장생주」 소문은 프랑스 전역에 퍼져 나갔고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가난에 찌들었던 프로몽테르 수도원은 하루아침에 돈 방석에 앉게 됐다. 수도원이 달라졌다. 건물을 새롭게 수리됐고 뾰족탑은 새롭게 세워졌으며 쏟아져 들어오는 돈
작금의 한국은 어둠이 덮인 미로를 헤매는 길 잃은 아이와 같다. 침몰한 세월호가 바로 그동안의 대한민국의 실체였고 실재였다. 억울한 희생자를 셀 수 없이 만들어 내는 우리 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사고 이전부터 옆으로 기울여진 채로 운항하였던 세월호 그 자체였다.우리 스스로가, 인간 스스로가 그 본래의 주어진 참 된 모습을 지키며 살아낸다 해도 턱 없이 부족한데 우리는 어느 새 우리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하는 그릇된 ‘주의’(-ism)에 함몰되어 살아왔다. 쟈크 엘룰(Jacques Ellul)이 그의 저서 ‘뒤틀려진 기독교’(La Subversion du Christianisme)에서 “주의(isme)라는 어미가 붙으면 정의가 명확한 원래의 개념에 어떤 새로운 것이 주입되는 것을 뜻한다. 어떤 사상에 ‘주의’라는 말이 붙게 되면 독창성은 제거되고 진부하게 되므로 하나의 삶 또는 사상은 그의 근본성과 항구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두드러진 고정관념은 이제 모호하게 변하기 쉽다.…문제의 ‘주의’에 의해 원래의 내용은 교체되어 완전히 모순되는 경향으로 형성된 낯선 고정관념이 나타난다.”라고 ‘주의’에 대하여 설명을 한 것은 오늘 우리의 문제를 찾는데 큰 도움이 되고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찬양한다. 부활이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활절이란 단어의 기원을 알고 있는가? 부활절은 영어로 ‘Easter’이다. 이스터라는 용어 자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성경적인 명칭이 아니다. 이스터(Easter)는 바로 아스타르테(Astarte)이다. 이스터나 아스타르테는 하늘 여왕의 이름(렘 7:17~18)이다. 이 이름들은 여신 아스다롯(Ishtar)의 다른 이름이다.(『두 개의 바빌론』, Alexander Hislop ) 영어 사전에 보면, 이스터는 ‘빛과 봄의 여신’ (goddess of light and spring)이라고 되어 있다. 부활절이란 단어는 앵글로색슨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이교(異敎)의 새벽 여신으로부터 유래한 용어이다(카톨릭 백과사전, 1987년 판). 그러므로 이스터라는 단어는 기독교가 아니라 그 기원을 이교(Cult)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성경은 부활을 이스터(Easter)라 하지 않고, ‘the Resurrection’ 이라고 한다.(벧전 3:21) 하여 로마 카톨릭이 지키는 부활절 날짜와 성경적인 교회가 지키는 부활일 날짜는 당연히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
프란치스코 교황은 참으로 훌륭하다. 그의 청빈한 삶은 예수를 닮은 듯한 모습으로 투영되면서 감동과 칭송이 연일 끊이지 않는다. 그런 교황이 금년 8월 한국을 방문한다. 한국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교황의 방문은 거의 재앙에 가까운 뉴스다. 가톨릭은 반대하지만 교황 프란치스코의 행보 하나 하나가 너무나 큰 파급력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이전의 교황과는 다르다. 가톨릭의 교리와 주장들의 이전 모습과는 다른, 탈권위적으로 방탄차가 아닌 무게차를 타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 자신의 생일에 가장 소외받는 노숙자들을 초청하는 일들은 성경에서 우리가 자주 보아왔던 예수님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도시풍과 력셔리함을 추구하는 이 시대에 그는 도리어 시골풍으로 검소함과 실용성으로 삶을 이루어 가고 있는 감동 메이커이다.이런 그의 삶은 결국 높이 평가를 받아 ‘올해의 인물’로 지난해 선정된 것에 이어, 지난 3월 20일 세계의 위대한 지도자 50인 가운데 1위로 선정됐다.(미국 포춘지) 염주교가 추기경이 되는 경사와 함께 한국 천주교는 교황의 방문이라는 또 하나의 축제를 준비하게 됐다. 비난만 할 수 없는 그들이 보여주는 삶들은 오늘 기독교가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gospel)은 하나님을 떠난 세상, 타락해버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복된 소식이다.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성경에 미리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고 장사되신지 삼일 만에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실 것을 성경에 미리 약속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Lord)에 관한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seed)에서 나셨다. 그런데 ‘육체로는’이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은 문자적으로는 예수님이 다윗을 통해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에서 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다윗의 씨는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윗의 후손인 ‘고니야’(Coniah)가 왕으로 있을 때 그는 왕이 될 자식이 없을 것이라고 저주를 받았다.(렘 22:30)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은 한 처녀(a virgin)를 통해서 태어나셔야만 했다. 그리고 거룩함의
교황 프란치스코1세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그는 이전의 교황들과는 분명 다른 행보를 거듭하면서 세계인들의 감동이 되고 있다. 그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조명을 받으면서 그는 가톨릭교회의 가장 유능한 전도자가 됐다. 그에 대한 좋은 이미지들은 가톨릭교회의 이미지로 나타나면서 전 세계인들이 가톨릭을 선택하는데 결정적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그가 지금까지 보여준 대로 청빈한 자의 삶을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젊은 시절 감염으로 폐 하나를 제거한 채 50년을 살면서 한 호스피스 병동에서 에이즈 감염자의 발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는가 하면, 주교 관저를 거부하고 작은 아파트에서 살면서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교황으로 선출 된 이후 교황 명을 12세기 가난한 자들의 성자로 불렸던 프란치스코를 택한 것은 그의 삶과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 빗어낸 결과였다. 실제로 그는 교황이 된 후 ‘가난한 이들을 위해주는 가난한 교회를 사랑한다’라는 말을 하면서 그의 가치관을 가톨릭 가치관으로 승화시켰고 전 세계는 그런 그를 뜨겁게 환영하며 사랑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그의 이름다운 모습들이 또 공개되면서 그와 가톨릭
조국교회에 어느 때부턴가 종말론 강해가 사라졌다. 시한부 종말론자들 때문이었다. 그러다 요즘 다시 붐이 일고 있다.그런데 그 종말론이라는 것이 조금 수상하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는 많이 빗나가 있다. 특별히 다니엘의 70 이레(Seventy weeks) 예언과 마태복음 24장이 그렇다. 이 해석이 잘못되면 영원한 속죄 교리에 문제가 생기고 급기야는 요한계시록과 히브리서 해석까지 문제가 생긴다. 종국에는 예수님의 희생과 부활까지 무효화 시키는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 다니엘의 70주 예언, 다시 말해서 다니엘의 490일 예언은 구약시대, 예루살렘 회복과 건축명령 때부터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신 때까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예언이다. 이 예언(단9:24~27)을 이해하면 세대주의 누룩 인‘미래주의(Futurism)’의 미혹을 드러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다니엘서 9장 24절과 27절이 해석의 고갱이(core)다.먼저 성경의 예언 어법에서 하루는 한 해와‘등가(等價)’이다.(겔 4:5~6) 한 주는 7년이고 70주는 490년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의 70주, 즉 490년의 기간은 예루살렘 회복과 건축 명령 때부터 예수님이 메시아가 되신 해까지를 나타낸다. 메시아(Mes
엊그제 프란치스코 교황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비롯한 한국 천주교 창립 주역인 124명을 복자(福者)로 올렸다.지난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김대건 신부 등 103명을 성인(聖人)으로 추대한 이후로 한국 카톨릭계의 경사라 할 수 있다. 천주교의 복자는 성인 바로 다음의 반열로 “신앙의 스승”을 가리킨다.1791년에 일어난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사건으로 천주교의 수난은 시작됐다. 윤지충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외사촌 권상연과 상의해 어머니의 제사를 안 지내기로 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당시 천주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이다. 이들의 신앙의 절개를 기념하기 위해 전주 풍남문 앞 전동성당에는 목에 형틀을 쓴 사람과 손에 십자가를 든 사람의 동상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윤지충과 권상연의 동상이다. 이 후 천주교의 박해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체포된 후 관아의 심문에 답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든지 지옥으로 갑니다. 죽은 이는 집에 남을 수 없고, 또 남아 있어야 할 영혼도 없습니다. 위패들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닙니다. 그저 나무토막에 불과 합니다. 어떻게 그 것들을 부모님처럼 여기고 받들 수
새해가 되어도 가야 하는 인생길은 그대로다. 마음은 새로운데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목회도 인생도 여전히 팍팍하다. 다시 세상이 커 보인다. 세상이 커 보이니 하나님이 작아 보인다. 하나님이 작아 보이니 문제가 커 보인다. Dipso! 목이 마르다. 하여 또 다시 부흥을 갈망한다. 부흥이 무엇인가? 부흥(Revival)은 새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살리는 것이다.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D. Martin Lloyd-Jones)는 ‘부흥’에서 부흥을 이렇게 정의한다. “부흥은 하나님이 그 백성을 찾아오시는 일이다. 천국의 나날들이 이 땅에 임하는 일이요, 성령이 교회에 거하시는 일이요,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한없이 넘쳐나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부흥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욱 드러내는 일이자, 죄에 빠진 인간의 죄악과 무력함과 소망 없음을 드러내는 일이다.” 부흥만이 나를 살리고 내 가정을 살리고 내 교회를 살리고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이다. 그렇다면 부흥은 언제 오는가? 부흥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부흥은 절대로 만들어 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흥은 하나님이 주시니 그냥 무릎 꿇고 기도할 뿐이
지난해 끝에서 우리 사회의 현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서 분출한 것이 있었다. 한 대학생의 사회를 바라보는 눈과 의식이 녹아서 표현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주제의 대자보가 바로 지난해의 시대상을 군더더기 없이 그대로 적절하게 표현하며 사회의 큰 방향을 불러온 사건이다. 이후 각 대학들과 다양한 계층과 지역에서 ‘안녕하십니까?’라는 질문들을 통해 오늘의 우리들의 자화상을 노출시키며 감추어져 있던 욕구들을 분출함으로 그동안의 과격한 시위보다도 더 폭발력 있게 그 위력을 실감케 했다. 이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세대를 불문하고 스스로 88만원 세대라고 밝힌 그의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요…그것이 무슨 내용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불편한 지적대로 안녕하지 못한 것에 대해 소리라도 쳐야 했는데 소리는 고사하고 그저 죽은 채 하고 살아야 했던 이 땅의 나약한 자들을 대신한 그의 한 방에 은근히 카타르시스(catharsis)같은 쾌감을 느꼈다. 문제는 새해가 됐음에도 여전히 이 땅의 우리들은 안녕하지 않다는 것이다. 진, 보수 이
예수님은 과연 12월 25일에 오셨는가? 우리는 그 날을 기념해야 하는가? 성경을 자세히 살피고 역사기록들을 부지런히 공부하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12월 25일에 출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2월 25일은 바벨론 태양신 축제의 날임을 알 수가 있다. 12월 25일이 어떻게 태양신 축제의 날이 되었는가? 고대 바벨론 왕국은 바벨탑을 쌓기 이전부터 노아홍수 심판을 거치면서 태양을 생명이라고 숭배하기 시작했다. 창세기에 보면 니므롯(Nimrod)이 바벨이라는 큰 성을 세우고 하나님 앞에 처음 영걸이 되었다.(창10:8-9) 니므롯이 죽은 후에 그의 어머니이자 부인이 된 구스의 아내 세미라미스(Semiramis)가 니므롯을 태양신으로, 자신을 월신(月神)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그 때부터 12월 25일은 태양신 숭배의 날로 지켜지기 시작했다. 에스겔서에도 태양에게 경배하는 기록이 있다.(겔8:16) 이 바벨론의 태양신 숭배가 메데, 페르시아, 헬라, 로마 제국으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로마 카톨릭이 서기 5세기경에 12월 25일을 예수님 생일로 영원히 지킬 것을 명령했다. 그 때부터 오늘날의 성탄절 즉 크리스마스(Christmas, 그리스
새벽송의 추억이 그립다. 크리스마스 전날이 되면 밤이 맞도록 집집마다 다니면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불렀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선율은 또 얼마나 감미로웠는지…. 참 아련하고 따뜻한 추억이다. 그러나 이제는 잊어야만 하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가슴이 아프다. 크리스마스의 진실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축제(?)를 즐길 수가 없게 됐기 때문이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께서 탄생한 날로 달력에 지정된 날이다. 그러나 이 날이 정말 그분께서 탄생한 날인가? 또 오늘날 교회에서 행하는 크리스마스 관습들(트리 장식, 산타클로스, 캐롤송, 선물교환 등)은 기독교의 기원을 갖고 있는가? 아니면 고대 이교주의(Cult)의 산물인가?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날짜에 대한 진실은 다음 번에 다루려고 한다. 먼저 ‘크리스마스’라는 단어의 어원을 찾아보면, 크리스마스(Christmas)는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가 합쳐진 것이다. 미사란 라틴어 “Massa”에서 나온 말로서 로마카톨릭의 그리스도의 미사(Christ`s Mass)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특별한 미사이다. 미사는 예배가 아니라 제사이다. 크리스마스는 초기
2002년 미국 의회가 전화기의 최초 발견자를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서 안토니오 뮤치로 수정 발표했지만 일반적으로는 1876년 벨이 최초 전화 발명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시작된 전화의 역사는 여러 과정을 거쳐 1980년 대 휴대폰 시대를 연다. 집에서 거리로, 고정에서 이동으로 변신을 한 것이다. 처음의 휴대폰은 크기나 편리성에서 여러 가지로 불편했지만 점점 진화해 1993년 IBM의 흑백스마트폰을 거쳐 2008년 애플의 2G를 3G로 업그레이드 된 아이폰과 2010년 안드로이드를 기반으로 한 삼성의 갤럭시S가 출시되면서 인터넷 웹서핑과 각종 검색, SNS 등 휴대폰의 활용 영역이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대됐다.최근에는 지문인식과 안구인식의 기능을 하는 능력까지 발휘하며 세상을 향해 그 거만한 혀를 날름거린다. 이렇게 세계가 스마트폰의 지배를 기꺼이 수용하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인터넷과 함께 휴대폰 보급률 및 교체율에 있어 당당히 세계 1위를 고수하며 달리고 있다. 이는 거의 종속 및 지배수준이다. 이제 휴대폰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우리 생활의 절대필수품이 되었다.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마음대로 돌려대듯이 휴대폰은 단순한 통화기능에서부터 대부분의 분야에
교회 부흥과 교회 성장은 다르다. 부흥(revival)은 새롭게 되는 것이다. 영혼이 구원받고 구원받은 성도가 새롭게 회복되는 것이다. 성장(growth)은 주로 신자 수가 늘어나는 것이다.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춘 많은 프로그램들이 있다. 그 중에서 단연코 알파 코스와 G12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과연 알파 코스는 성경적인가? 성경에서 금(Gold)은 우상을 만들어 섬길 때 쓰며 인간을 타락시키는 물질로 나와 있다. 또성경에서 금은 오직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의 성구들을 만들고 예수께 경배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기 위하여 드려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그런데 요즈음 알파코스나 G12같은 은사주의 집회를 하는 현장에서는 금을 성령님(?)께서 금이빨과 금가루로 주고 있다고 한다.왜성령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이율배반적으로 만들면서까지 이런 기적(?)을 베푸시는 것일까? 이러한 현상들을 따라가고 있는 알파코스와 G12는 무슨 원리에 기초한 프로그램일까?알파코스(Alpha Course)는 1990년, 영국 런던의 성공회 소속 ‘성삼위일체 브럼턴성당’에서 니키 검블(Nicky Gumbel) 신부에 의해 시작됐다. 브럼턴성당은 은사주의적 성공회 교회이다. 알파코스는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