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자되는 유머가 있다. 하루는 할머니 한 분이 골목길을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 처녀, 같이 가 처녀!” 할머니는 속으로 “아니 내가 아직도 처녀처럼 보이나, 내 뒷모습이 그렇게 예쁜가.” 하고 생각했 다. 할머니는 누군지 보고 싶었지만 남자가 실망할까 봐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께서 싱글벙글하자 손자가 물었다. “할머니.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었어요?” “아까 집에 오는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처녀라고 그러더라.” 손자는 믿기지 않는 듯 “잘못 들은 건 아니고요?” 그러자 할머니는 정색을 하며 “아니야. 내가 분명히 들었어. ‘같이 가 처녀’라고 했어.” “그게 누군데요?” “그건 모르지, 하여튼 남자들은 예쁜 건 알아가지고?” “그럼 내일 보청기 끼고 다시 잘 들어보세요.” 이튿날 할머니는 보청기를 끼고 집을 나섰다. 하루종일 돌아 다녀봐도 그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일 다시 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오는데 뒤에서 어제 들었던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잠시 착각하고 사는 것도 행복할 것 같다. 마을에서 공부하시는 문해학교 학생들은
요즘 전세계가 ‘오징어 게임’이라는 한국 드라마 때문에 난리다. 미국 에서 목회하는 필자에게 오징어 게임의 인기는 놀랍다. 고등학교 다니는 딸에게 미국 친구들이 오징어 게임 봤냐고 묻는다고 한다. 정말 한국 게임들 중에 구슬치기, 뽑기 등이 있냐고 묻는다고 한다. 사실은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아들에게까지 미국 친구들이 오징어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넷플릭스에서 계속 몇주째 1위다. 요즘 한국 사람으로 매우 살만한 세상이다. K-콘텐츠가 세상을 휘어잡고 있다. 쇼핑몰에서도 BTS나 블랙핑크의 노래를 종종 듣기도 한다. 게다가 영화 그러면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에 열광하던 우리에게 기생충, 미나리 같은 영화의 성공과 오징어게임의 흥행은 놀라운 그 자체다. 사실 한국 사람들은 IMF를 겪으면서 콘텐츠의 힘을 깨닫게 됐다. 당시를 기억하는 분이라면 IMF와 금모으기 운동을 따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꼭 독립운동하듯 금을 모았던 기억이 필자에게도 있다. 그런 온 국민의 노력이 당시 개봉한 타이타닉이라는 영화 한 편으로 완전히 물거품이 됐다. 외국 영화 한 편이 한국에서 벌어간 돈이 온 국민이 헌신했던 금 모으기 운동의 금액과 비슷했던 것이다. 나라의 어려움을
역대상 4장 9~10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야베스의 기도”로 많이 알려진 말씀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2000년대 초반 애틀랜타의 부르스 윌킨스 목사님의 야베스의 기도-내 삶을 채우는 기적의 원리라는 제목의 책이 세계적으로 천 만 부가 넘게 팔리게 되면서, 많은 크리스천들의 관심을 받게 됐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 나오고, 큰 성공을 거두었을 때, 책을 비판하는 글들 또한 많이 출간되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크리스천들의 기도 모델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이 돼야 하는데, 야베스의 기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했으며,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독자들에게 기복적인 신앙을 불어 넣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윌킨스 목사님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른 현상이나, 이것에 반응해 많은 비평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온 것들을 돌아볼 때, 야베스의 기도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이 큰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사실 본문의 말씀은 많은 학자들을 오랫동안 고민하게 만들었는데, 그 이유는 야베스의 기도가 등장하는 본문의 해석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야베스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 부분은 역대상 4장 9~10절의 말씀뿐이고
다른 교단의 교회가 우리 예배당에서 50m 정도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건물을 짓고 옮겨 왔다. 좀 심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여기며 마찰이나 분쟁은 피했다. 그런데 그 예배당 마당엔 낮이면 아이들이 몇 명씩 수시로 방문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기도해온 우리로서는 큰 관심거리였다. 전에 우리 교회에서 아이들을 위한 행사를 가졌다. 어느 아파트 놀이터에서 4학년 여자애 2명에게 초청장을 주면서 경북 청도에 있는 새마을 운동 발상지를 구경시켜준다는 얘기까지 했다. 거기엔 P대통령이 장관들과 함께 탔던 열차가 있는데 누구든지 타볼 수 있다고 했더니 느닷없이 격렬하게 대꾸했다. “P대통령 나쁜 사람이잖아요. 독재자이고 친일파이지요. 우린 거기 가지 않을래요.”하고는 다른 곳으로 훌쩍 가버렸다. 예전에 여름성경학교를 개최하면 수십 명씩 참석하던 아이들과는 너무나 달랐고, 지금의 아이들을 전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웃 교회에는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행사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아이들이 끊임없이 방문케 하는 비책이 뭔지 몹시 궁금했다. 그것은 교회당 마당 한 쪽 구석에 줄로 매어놓고 키우는 ‘시베리안 허스키’
포스트모더니즘과 복음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사회의 문화의 삶과 사고를 지배해온 모더니즘–인 간의 합리적 이성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는 현대 정신의 길–에 대한 반동이다. 과거 모더니즘 시대를 부정하며 해체 주의, 탈구조·탈중심주의, 다의성·상대성, 탈인간화를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음주의 신학은 성경의 최고 권위를 인정하고 믿음으로 주어지는 중생의 개인적인 체험을 강조하기에, 이 시대의 정신과 삶을 주도해야 하며, 미래교회와 신학을 책임져야 할 중차대한 과제를 지니고 있다. 과학적 검증을 받지 않은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이 시대를 향해 하나님의 초월 성과 성경의 절대 권위를 선포해야 한다. 또한 성경적 영성의 회복을 강조해야 한다. 이렇게 역사적 복음주의 신앙의 전통과 유산을 공유하면서 한국교회 안에 올바른 복음주의 신학과 운동을 펴 나가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에는 신학자, 목회자의 거듭남과 영적 갱신이 우선돼야 한다. 공공성과 신학적 책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공적 진리의 타당성을 보여 줘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 문제이며, 공적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공공여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만 상징적 언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일반적인 가르침에서 상징적 언어 또는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다. 예수가 “나는 문이다”(요10:9)라고 선언할 때, 영생과 구원의 문이 되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예수가 그렇게 선언하실 때문이라는 물체가 그리스도의 실체로 본질이 변하는 것도 아니며 그리스도가 문의 밑에, 함께, 또는 안에 그리스도가 임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체험하는 문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의 선언에도 문은 문으로 남아 있지만 단지 그리스도가 문맥 가운데 말씀하신 내용처럼 예수는 구원의 통로가 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매개체를 보여주는 그림 언어로 작용한다. 동일하게 주의 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 언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대한 침례교 전통의 기념설에 의하면, 주의 만찬의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그리스도 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 상징체의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은 과거에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미래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념
요즘 많은 목회자들은 회중이 아니라 카메라 앞에서만 설교하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한 두 주하고 끝나겠지’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섰을 것이지만, 이제는 카메라 앞에서 설교한 지도 1년이 넘어서고 있다. 어쩌면 회중도 없이 혼자 설교하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도 있고, 아니면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속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전 세계가 온라인 환경과 생활에 더 집중하고 있고,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 2020 도쿄올림픽이 열렸다. 무관중 경기라는 희대의 올림픽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집에서 TV로 올림픽을 봐왔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관중 경기는 별 의미가 없다. 그냥 TV로 보던 대로 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은 것처럼, 온라인 일상과 온라인 신앙생활도 점점 우리 삶에 매우 깊숙이 들어오고 있다. 팬데믹이 시작될 때 우리는 온라인 예배가 가능할까 의구심을 가졌지만, 이제는 온라인 예배과 신앙생활도 하나의 예배와 신앙생활의 형태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온라인의 한계를 극복하는 새로운 사역 모델을 만드는 그룹도 등장했다.
V. 침례교 전통의 주의 만찬의 이해 주의 만찬에 대한 침례교 전통은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임재할 수 있는가’란 추상적 논쟁보다는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성례전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가 아니면 특별한 사람에게만 허용돼야 하는가 하는 실천적인 문제에 더 관심을 둔다. 침례교 전통은 주의 만찬을 열린 주의 만찬과 닫힌 주의 만찬으로 구분해 실행한다. 열린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모든 그리스도인은 만찬에 참여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복음주의 교회의 회원들을 어떤 교리나 교회 의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의 만찬에 참여하게 한다. 반면에 닫힌 주의 만찬은 물에 잠기는 침례 의식을 받은 사람들만이 참여하게 한다. 어떤 의식 절차보다도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결단하고 고백하는 것을 믿는 구원의 증거로 여기는 침례교 전통은 오직 침례(세례 또는 영세)를 받은 자에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게 하는 다른 교회 전통과는 달리 열린 주의 만찬에 문을 열어 놓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의 침례 의식을 행한 자들에게만 허용하는 닫힌 주의 만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의 기능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반인들이나 교인들도 목회자는 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 신앙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치며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목회자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청빈하게 살면서 남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며 살아야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하여 보리밥 세끼도 먹을 수 없던 시절에 선배님들은 밥 세끼만 먹을 수 있으면 감사하며 목회를 했다. 어려운 시대에 선교사님들과 선배님들이 가난하게 살면서 목회하며 한국교회를 이만큼 발전시켜주셨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4차 산업시대를 말하는 21세기의 현대사회는 모든 분야가 놀랍게 발전했고 복지 제도도 엄청나게 발전하고 있다. 공무원이나 회사원들도 기본적인 복지혜택은 다 보장이 되고 정년퇴직 후에도 연금이 있고 큰 문제없이 노후의 삶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목회자들은 아직도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이 많고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현상이 너무 심각하다. 교회에 따라 부목회자나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은 복지라는 말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가장 기본인 사회보험(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분들이 많다. 큰
이번부터는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전파 사역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가장 극적인 사역인 예수님의 귀신축출 사역의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소위 ‘축귀’ 사역으로 알려진 ‘귀신축출’ 사역은 지금은 이단으로 인정된 어느 목회자의 전유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일부 목회자들에 의해 개인적으로 행해지고 있지만, 많은 목회자들은 이사역에 관해 잘 모르기도 하고 무관심하기도 한 사역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신이 여러 차례 귀신들을 쫓아내셨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요약적 진술들에는 대부분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신 것”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마 4:24; 8:16; 막 1:34; 눅 6:18). 예수님이 그의 열두 제자들을 따로 세우신 목적 중 하나는 귀신축출 사역을 계승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막 3:15). 예수님은 그의 열두 제자들로 하여금 그의 사역을 계승하며 재현하는 복음을 일꾼들로 훈련하기 위해 그들을 내보내시면서 귀신축출의 권세를 주셨다(막 6:7; 마 10:1; 눅9:1;10:17). 마가에 따르면, 예수님의 귀신축출 사역은 그분이 행하신 첫 번째 공적 사역이었다(막 1:21~28; 참고, 눅 4:33~37). 누가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기의 공
인권과 기독교 인권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엄성을 갖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권은 사회에서 교회가 책임져야 할 아주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교회는 인권 문제에 대해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실천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단순한 대응이 아닌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인권에 대한 문제들을 성서에 근거해 적절하게 이해하는 작업과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실천 방안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각 분야에 나타나고 있는 인권 문제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선행을 바탕으로 인권에 대한 성경적 가치관 정립뿐만 아니라 올바른 성서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리고 각종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인권 실현에 대한 의지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야 한다. 이때 개인적 차원에서만 인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교회 간의 협력 등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서도 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양극화에 대한 반성 양극화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 하는 빈부격차와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반목 현상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양극화의 심화를 겪고 있는데, 이는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화체설은 떡과 피가 직접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본질적 실체로 바뀜으로 그리스도가 임재한다고 설명했다면, 공재설은 떡과 포도주는 그대로 있지만 그리스도가 떡과 포도주에 임재하심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떡과 포도주가 공존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루터는 삼위일체의 연합(일치)과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떡과 포도주의 연합은 유사한 신적 신비로 이해했다. 그가 떡을 분배할 때 그리스도가 그의 몸을 먹도록 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기술한 본문이 지금 여기에 있다. 이것 위에 우리는 주의 만찬에서 우리가 참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몸을) 취한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믿고 가르친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발생하거나 어떻게 그가 떡에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속박하거나 측정하는 것 없이 우리가 믿어야만 한다. 우리의 눈으로 그 떡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현존한다는 것을 우리의 귀로 듣는다. 공재설은 플라톤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주의 만찬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플라톤은 눈으로 볼 수 있
나는 지난 기고글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데, 가장 먼저 찾아오는 심판은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걷힌다는 것을 나눴다. 헨리 블랙가비 목사도 그의 책 ‘하나 님과의 신선한 만남’(요단)에서 정확하게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한 매우 좋은 예를 우리는 말라기 시대에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부분을 살펴보는 주된 이유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기 위해서다. 우선 말라기 시대는 하나님을 버린 시대였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 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 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1:6). 이사야 1장 4절을 보아도 알수 있듯이 하나님을 멸시한다는 말과 하나님을 버린다는 말은 같은 뜻이다. 문제는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항상 이런 일이 발생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그들에게
“도서관에 간다고 공원길에서/ 살금 살금 데이트만 하고 와서는/ 밀린 숙제 못하고 끙끙대더니/ 그만 그만 사르르 잠이 들었네/ … 시끄러운 찻집에 홀로 앉아서/ 메모지에 낙서만 하고 있다가/ 시험지를 받아드니 아는 게 없어/ 또르 르르 연필만 굴리고 있네…” ‘안 되는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90년대 쿨 시스터스의 노래인데 우리 존재의 부끄러운 단면을 보여준다. ‘몰라서 저지르는 잘못’과 ‘알면서도 저지르는 잘못’이 있는데 본문에 ‘알면서도 잘못을 범한 불순종의 사람’이 등장한다. 사울 왕이다. 급상승하던 사울 왕이 급전직하로 추락한다. 화려한 등장은 잠깐일 뿐, 사울은 곧바로 긴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알면서 저지른 잘못 사도행전에 사울의 집권을 40년이라고 했지만 그 40년은 모세부터 사무엘, 다윗, 솔로몬 등 통상적으로 적용되는 연대일 수 있기에 정확히 얼마동안 집권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청년 시절에 기름 부음 받고, 아들 요나단이 활발히 활동하고 손자까지 봤다면 꽤 오랜 세월을 왕위에 있었을 셈이다.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1절) 라 한 것도 히브리 성경에는 40이라는 숫자마저 나오지 않고, 표준새번역에서는 30세라 했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악처로 유명하다. 소크라테스 일화 가운데 스승의 결혼생활을 잘 아는 제자가 결혼에 관하여 “꼭 결혼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결혼해라 악처를 만나면 철학자가 될 것이고, 좋은 아내를 만나면 행복할 것이다. 둘 중에 하나이기에 결혼해라.” 그러자 힘든 삶을 아는 제자이기에 “선생님은 그런 악처를 왜 버리지 않고 함께 사시는 겁니까?”라는 질문에 소크 라테스의 대답이다. “훌륭한 기수는 원래 사나운 말을 좋아하는 법이다. 내가 그것만 길들이면 세상에 못 할 것이 없다.” 어버이날 즈음에 지난해 천국에 가신 장모님을 보고 싶다는 아내와 함께 부모님을 모신 곳에 가는 길이었다. 아내의 고향인 논산을 지나가다가 옛날 아내를 만나려고 새벽에 논산역을 찾아갔던 기억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왜 그때 그랬는지 몰라.” 농담 삼아 던진 말에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나 혼자 주님께 더 잘 할 수 있을 텐데 왜 그랬어?” 투정 섞인 목소리에 “그 결과로 예쁜 두 딸을 선물로 받지 않았느냐?” 며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내의 말대로 아내는 혼자 살았어도 자신의 일을 잘하며, 더 많은 일을 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하며 살았을 것이다. 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