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지금도 토레이의 번역된 저서들은 한국교회 내에서 중생과 성령침례 사이를 구분하는 개혁파 성령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는 무디와 동역하면서, 그리고 무디신학교의 교장으로서 수많은 교계지도자들과 선교사들에게 명확한 체험으로써의 성령침례를 강조했다. 19세기 개혁파 성령운동의 여러 경향 중에서 그의 성령침례론의 핵심은 “봉사의 능력”이었다. 토레이는 성령으로 인해 거듭나는 일과 성령으로 침례 받는 일은 전혀 다르다고 봤다. 우리 마음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지니는 것과 성령께 완전히 붙들려 우리가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듭남에 있어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생명이 부여되어 구원받게 되는 것이지만, 성령침례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토레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을 위해 복음전도 등 어떤 봉사를 하고자 할 때는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마련이라고 하면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침례를 받으면 다 권능을 얻게 되는데, 그 권능은 곧 하나님에게 부르심을 얻은 일을 감당하기 위한 권능이라고 했다. 토레이의 성령침례론은 기사와 이적 중심은 아니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고 난 후 20년 이상 우리나라 경제는 침체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취업문제와 주택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했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필자는 IMF가 오기 전에 예배당에 화재가 발생해 갑자기 건축을 하게 됐는데 교회가 부흥되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빚을 내서 건축을 하는 중에 IMF가 와서 6개월 만에 완공하고 입당하기로 했던 계획이 틀어져 4년이나 걸리면서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입당은 했지만 IMF로 실직을 한 사람, 폐업을 한 사람, 타지로 떠난 사람, 장기간의 건축으로 떠난 성도들도 있었고 IMF로 인한 경기침체와 함께 교회부흥도 침체되면서 건축 부채를 갚느라 힘겹게 목회를 했다. IMF사태 이후로는 교회를 개척해도 자립이 어려워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는 교회들이 늘어났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경제활동을 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몰리면서 일을 하게 됐고 목회자의 이중직에 대한 이야기가 대두됐다. 목회자는 강단에서 기도하다가 죽을 각오를 하면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보내 주신다면서 다른 일 하는 것을 소명의식이 결여된 목회자로 여기며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목회자들이 자주 보는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조회수가 가장 많은 게시판 중의 하나는 청빙게시판이다. 우리 교단의 총회 홈페이지도 예외는 아니다. 목회자청빙 게시판의 평균 조회수가 가장 많은 편이다. 그만큼 어느 교회에서 사역할 것인가 하는 것은 목회자들의 큰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사역하는 교회를 떠나 다른 사역지를 찾는 이들도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교회들도 새로운 목회자를 구할 때 신문이나 SNS의 청빙공고를 통해서 목회자를 구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것이 됐다. 특히 요즘 시대는 청빙과정에서의 투명성과 공평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러한 과정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바라던 교회나 사역지에서 청빙공고가 나오면 요구되는 제출서류를 준비해 제출하게 되는데, 교회들은 엄청난 지원서류 더미에 시달리게 된다. 필자도 한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사임을 하고 떠나려고 할 때에 목회자 청빙공고를 냈었던 적이 있는데 무척이나 많은 지원서류를 받아봤던 기억이 있다. 심지어 서류를 제출하신 분들 중에서는 전화까지 걸어 이러저러한 것을 문의하기도 하고, 자기를 선택해달라고 부탁하는 분들까지 있었다. 독일에서 사역할 때도 주변의 한인교회
궁인 목사 휴스턴 새누리교회 코스타(KOSTA) 강사 미국에서 목회하는 필자는 최근 ‘코로나 종식’을 선언하면서 3년 만에 새벽기도회를 다시 시작했다. 새벽기도회를 마지막으로 모든 공식 예배가 정상화됐다. 상반기를 목표로 하는 평신도 소그룹 (목장)만 다시 시작한다면 모든 교회 사역과 부서가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고민이 있다.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다. 예배와 조직은 다시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도들과 성도들의 헌신을 코로나 이전으로 돌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필자가 사역하는 휴스턴은 1년 전부터 마트와 레스토랑에서 마스크도 안 쓰고 다니고 모든 일상생활이 안정을 찾은 듯 보이지만, 신앙생활에서만은 아직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오진 않은 것 같다. 지난 몇 년 동안 성도들은 전염병으로 인한 극한의 두려움과 사회적 고립을 경험했다. 어쩌면 영원히 팬데믹 이전으로 돌이키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매우 오랜 기간 성도들이 집에 고립됐고 가족 위주로 생활을 하다 보니 우울감을 호소 하고 있는 성도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지난 몇년 동안 성도 간의 교제와
윤영철 목사 한아름공동체교회 에베소서 1장 9절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환경과 사람을 보는 안목이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서 헤아리는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서 나와 환경과 사람의 형편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눈이 더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말씀 밖에서 혹은 말씀 언저리에서 머뭇거리는 삶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혹은 말씀 위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을 무한히 반복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그간 이해할 수 없었던 이모저모들이 선명하게 깨달아지고, 심히 어렵고 힘들게만 여겨졌던 교훈과 명령들이 오늘과 내일을 위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안내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일상을 통해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더욱 진하고 강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여, 이즈음에도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믿고 있는지’,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지’를 세심하게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이미 열어주신 눈을 ‘또 다시 어둡고 흐르게 만들고 있는지’ 아니면 이미 열어주신 눈을 ‘더욱 밝고 맑게 만들고 있는지’를 정직하게
김한순 목사 금마성산교회 침례교부흥사회 부회장 신학적 배경 토레이의 저서 ‘성령침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의 핵심은 이 책 속에 계속 되풀이 되는 다음과 같은 네 개의 명제로 요약된다. 첫째는, 성서는 이하나의 체험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이 있다. 즉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다” “성령 충만하였다” “위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았다”“성령이 그들에게 임했다” “성령의 은사 그리고 성령을 받았다”등 이다. 둘째는 성령침례란 우리가 그것을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분명한 체험의 문제 라는 것이다. 셋째는 성령침례란 성령의 중생케하는 사역과 별개의 것이요 구별되는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넷째는 성령침례란 언제나 증거와 봉사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토레이는 “죄로부터 정결케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인정했지만 그것이 “성령침례”는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을 함에 있어 토레이는 그의 예일 대학 동료였으며 그의 목사 안수식 설교자였던 힐스(A. M. Hills)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이 두 사람은 첫 목회를 서로 밀접하게 도와줬으며 영적 탐구에 있어서도 서로 조력했다. 그러나 1900년경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의 성령침례론의
에베소서 1장 8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윤영철 목사 한아름공동체교회 영원한 실상(實像)에 대한 영적인 안목은 세상의 지식이나 경험의 양을 더한다고 해서 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보이는 것 너머에 실재(實在)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 질서는 세상살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섭리하시고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볼 수 있는 것이고, 더불어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더 깊고, 더 넓게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의 일상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져 있는가’ 혹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 있는가’에 따라 영적인 안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여, 언젠가는 아니면 지금 당장에라도 복잡하고 분주한 일상을 정돈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일상의 제일순위로 두어야 합니다. 때마다 일마다 이미 알고 믿어진 영적 질서 그대로 끝까지 인내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이로써 세상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영적인 안목으로 선택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영원한 실상(實像)을 경험하며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믿게 하소서. 이처럼 보게 하소
이희우 목사 신기중앙교회 원래 한 권이던 사무엘서, 두루마리의 길이가 너무 길어서 인위적으로 두 권으로 나눈 것 같다. 나누는 기점은 사울의 죽음, 사무엘상이 사울과 다윗의 경쟁을 다뤘다면 사무엘하는 다윗이 주인공이 되어 통일왕국을 이루는 과정을 다룬다. 사무엘하의 1장부터 8장까지는 다윗 제국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다루고, 9장부터 20장까지는 왕위 계승자를 찾기 위해 다윗의 여러 후계자들을 걸러내는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며, 21장부터 24장은 부록이다. 본문은 다윗의 새 시대를 여는 첫 사건, 사울의 죽음으로부터 다윗의 시대가 시작 된다. 이 첫 사건을 다루는 다윗의 모습을 보면 그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다윗 시글락으로 돌아온 지 사흘 만에 다윗을 찾아온 한 청년(2절), 그는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비보를 전한다(4절). 그런데 그의 보고가 사울이 자살했다(31:4)고 한 삼상 31장과는 좀 다르다. 그 청년은 살 가능성이 없어서 자기가 죽였다며(10절) 사울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까지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성경은 부연 설명은 없지만 이 청년이 거짓말한 것으로 다룬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알고 자기 공을 내세
김원남 목사 양광교회 우리나라 원자력연구소의 소장을 역임한 장 박사라는 분이 어느 강연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기 인생에서 제일 쉬웠던 것은 나이를 먹는 것이었고, 제일 어려웠던 것은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타인과의 약속도 지키지 않는 경우가 있지만 자기와의 약속을 형편과 상황에 따라서 수시로 변경하거나 무시하거나 포기하기 쉽다. 그는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힘쓴 인생여로였다고 했다. 예로 건강을 위해서 새벽에 운동하기로 했는데 80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조깅을 했다. 어느 해 겨울엔 영하 18도로 몹시 추웠지만, 부인의 만류를 물리치며 정해진 거리를 조깅했다고 하니 철저 하게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의 독립과 더 나아가 세계 최고로 만들겠다는 뜻을 동료들과 함께 세우고 온갖 노력을 한 결과 한국 표준형 원자로가 개발됐고, 원자력 기술의 독립과 세계 일류가 되는 쾌거를 거뒀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서도 자기와 약속해야 할 것들이 있다. 이약속들을 잘 지킴으로 경건과 영적 성숙과 신앙생활의 진보에 큰 유익이 된다. 정 목사님이란 분이 ‘교회는 무릎으로 세워진다’는 제목의 책을
유병곤 목사 새울산교회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유명한 말을 기억할 것이다. 스피노자가 한 말이라고 기억하는데 스피노자가 한 말이 아니라는 사람도 있고 누구의 말인지 확실한 출처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꿈을 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사마리아 성이 포위되어 사람도 물자도 성안으로 들어올 수 없도록 봉쇄된 상태에서 여러 날이 지나자 성안에는 양식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굶어 죽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성안에는 굶주림이 극에 달하자 정신을 잃은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자식을 잡아먹는 비극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다. 매우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사마리아성 밖에는 나병환자 4명이 며칠째 굶주리고 있었다. 나병환자 중 한 사람이 제안하기를 우리가 성안에 들어가도 굶주리고 있으니 죽을 것이고 여기 있어도 죽을 것이니 우리가 아람 군대로 가서 항복하자 혹 살려 주면 살 것이고 죽이면 죽을 것이라고 했다. 모두 절망적일 때 실낱같은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해질녘에 아람 군대를 향하여 네 명의 나환자들이 걸어갔다. 며칠씩 굶은 환자들이 힘없이 걸어가는데 하나
윤영철 목사 한아름공동체교회 에베소서 1장 6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 안에서 남은 삶을 이해하고, 주인 되신 예수님의 교훈과 명령 안에서 남은 삶을 조정하며, 동행하시는 성령님의 섭리와 인도 안에서 남은 삶을 세워나가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남은 생만큼은 부활예수의 산 증인답게 머리 되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고,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큰 기쁨이 되고, 더 이상 후회가 없는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여, 날마다 내가 주인이 된 자리로부터 겸손하게 내려와야 하겠습니다. 주인의 생각과 계획을 알기 위해서라도 혹은 묻기 위해서라도 그 말씀 앞으로 진지하게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들려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어지게 하신 그 교훈과 명령 그대로 정직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부족하고 연약한 나의 안과 밖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드러나게 하소서. 이처럼 귀하고 귀한 남은 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소서. 진하고 강하게!
에베소서 1장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어둡고 부패한 세상의 본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활개를 칠 때면, 여지없이 예수님의 자리와 가치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탐욕으로 물든 사람의 주장과 업적들로 소란을 피우기 마련입니다. 비록 부활하신 예수님이 믿어져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옛사람의 악성과 악습이 통제되거나 소멸되지 않으면, 여지없이 예수님의 교훈과 명령은 부담스러운 과제로 남겨지고,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의 방식과 변명들로 저항하기 마련입니다. 이는 동서고금,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하나님 중심을 벗어난 세상과 사람들이 보여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지금 당장에는 혹은 얼마 동안이라도 더 없이 안전해 보이고, 더 없이 확실해 보이는 갖가지 이유들이라도 때가 되면, 결국 퇴색되고, 대치될 수밖에 없는 지극히 어리석은 반응입니다. 하여,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실상(實像)을 오늘도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음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과 사람들의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한 안내자를 오늘도 믿고 따라가고 있음에
에베소서 1장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나의 신념으로 믿는 것과 성령님의 역사로 믿어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믿어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믿어지고, 성령님의 동행하심이 믿어지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믿어지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 믿어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믿어지니, 시간을 더해갈수록 자원하지 않을 수가 없고,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말씀이 구구절절 마음 가운데 심겨질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수가 없고, 성숙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어진 그대로 행하기를 부단히 훈련할수록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고,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여, 오늘도 나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무능함과 부패함을 철저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겸손한 마음으로 정직하게 간구해야 합니다.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이미 믿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마음 그대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변화된 사람답
신앙과 이성에 대한 전망 연구자의 목표는 신앙과 이성의 긴장과 조화로운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신앙을 발견할 수 있음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이 분리된 시대에도 신앙과 이성은 여전히 우리 안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성은 우리가 맹목적인 믿음으로 나가는 것을 막아주고, 신앙은 이성의 활동에 풍요로운 의미와 맛을 부여한다. 신앙과 이성은 원래부터 인간의 문화와 삶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두 요소였다. 새는 날기 위해 두 날개가 필요하다. 진리를 향해 우리가 날 수 있었던 것은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 날개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이성의 빛만을 지나치게 절대화하는 오류가 이성주의, 합리주의이다. 또한, 신적 은총으로 이성이 정화되어 계시된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이성의 가능성을 불신하는 것이 허무주의로 흐르게 한다. 이러한 양극단으로는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어떻게 신앙의 본질을 손상하지 않고 철학을 신학으로 도입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성을 기반으로 한 철학은 언제든 오류 가능성이 있고, 비판되고 수정될 여지가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기에 기독교적 이성을 회복해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2. 토마스 아퀴나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눈 여겨 볼만한 대표적인 학자는 아퀴나스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방법론을 수용하여 기독교사상을 체계적으로 종합하는데 성공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800여년이 지나고 아퀴나스는 종교와 철학의 조화에 대한 입장을 피력했다. 아퀴나스는 신앙과 이성 모두가 동등한 자격을 지닌 진리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다. 이성은 자연의 빛에 의해, 신앙은 은총의 빛에 의해 성립되는 것으로 봤다. 그는 계시는 이성을 전제로 하며 자연을 파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한다고 본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으므로 계시가 없이도 이성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입장은 기독교 신앙에 문제점을 남겨 놓게 된다. 이성에 ‘자율성’(autonomy)과 ‘자기 충족 성’(self-sufficiency)을 부여하여 이성절대주의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됐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 이성에 앞선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알기 위해 믿는다’고 고백했지만, 아퀴나스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신학과 철학을 분리하면서 신앙과 이성을 구분했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은 구별되지만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파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