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솔함을 책망하지도, 불경함을 징계하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더 큰 선물로 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비웃음도 쓴웃음도 아닌 진정 행복한 웃음을 가질 수 있게 됐죠. 이 일로 사라는 할례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하게 됐습니다. 배 속에서 아이가 자라는 열 달 동안 자기 몸 안에 살아 있는 어린 생명을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손길을 느꼈겠죠. 이때가 사라에게는 신앙의 절정이었습니다. 문제는 절정이 지난 바로 그때에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창 21:9~10)
사라의 신앙고백이 나오자마자 창세기는 급격히 현실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시작은 아브라함이 베푼 이삭 탄생 축하 잔치였죠. 이삭이 젖을 떼자마자 아브라함이 성대한 잔치를 벌였는데, 이 자리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장면을 사라가 목격하게 됩니다. 발끈한 사라가 아브라함을 다그쳐 세웠습니다. 이스마엘을 하루빨리 내쫓으라고 말이죠.
이런 사건은 당사자 입장이 되어 보면 이해하기 좋습니다. 우선 이스마엘 처지부터 생각해 보죠.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왜 하필 이삭을 놀렸을까요? 이스마엘에게 이삭 탄생은 사랑스러운 동생이 생겼다는 반가움보다 소외, 질투, 위협 같은 어두운 미래를 의미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십 대 중반이었던 이스마엘이 이삭 때문에 불안해진 자기 처지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었을 테니 오해받을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스마엘의 행동이 이삭을 대놓고 무시하거나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저 동생에게 장난을 좀 쳤을 뿐인데, 어른 눈에는 희롱으로 보였겠죠. 아무리 동기가 순수하다고 해도 이삭을 놀린 행동은 문제가 될 가능성이 너무 컸습니다. 이스마엘 내면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이 무의식 가운데 드러나 가장 나쁜 사고를 치고 만 셈이죠.
사라가 보기에 이스마엘은 이삭에게 대단히 큰 위험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이 갓난아기였을 때 자신이 하갈을 학대하고 내쫓아서 죽을 뻔한 일을 겪게 했으니 앙심을 품은 이스마엘이 이삭에게 앙갚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결코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사라 말처럼 이스마엘은 장차 아브라함의 기업을 적게나마 나눠 받을 사람이었는데, 재산을 얼마나 나눠 줘야 할지도 의문이었던 데다가 상속 문제가 정리되기 전에 아브라함이 죽기라도 하면 자칫 분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습니다. 막 엄마 젖을 뗀 이삭과 달리 이스마엘은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고 있었으니까요. 이삭을 생각해서라도 이스마엘 문제를 빨리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의 행동이 적절한 명분을 더해 주었죠.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창 21:11)
아브라함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삭, 화가 난 사라, 난처한 하갈, 속을 알 수 없는 이스마엘, 그리고 이런저런 말을 하는 주변 사람 틈바구니에서 사건을 정리할 유일한 사람이 자신인 줄 알고 있었지만,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난 13년간 이스마엘은 누가 뭐래도 자기 재산을 물려받을 아들이었으니까요. 이삭이 태어나 상속자가 됐지만 어떻게든 이스마엘도 보살펴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사라의 기세를 꺾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단호하고 과감해 보였던 아브라함이라도 자기 삶의 문제, 특히 가족 문제에 있어서는 우유부단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사라가 이토록 강하게 나오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브라함이 절대 결단하지 못할 테니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창 21:12, 14)
결국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12절과 13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이삭과 이스마엘에 대한 계획이 따로 있음을 말씀하시며 안심시켜 주셨죠. 사람은 자신이 처한 지금 상황과 장차 이뤄질 모습을 상상하며 고민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세운 계획에 따라 정확하게 모든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이 차이를 모르면 자기 앞에 놓인 문제에 쩔쩔맬 뿐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기 힘들죠. 말씀에 안심이 된 아브라함이 다음 날 아침 하갈의 어깨에 물 한 가죽 부대와 먹거리를 지워 준 채 내보내고 맙니다.
자신은 하나님 말씀 덕택에 신앙으로 결심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내쫓김당하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는 이보다 가혹한 일이 없었습니다. 설령 아브라함이 사라 눈을 피해 이것저것 더 챙겨서 보냈다고 하더라도,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미래가 보장됐다고 느꼈던 그들이 이제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까요.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창 21:20~21)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에 대한 약속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브엘세바 광야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울고 있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찾아가셔서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살아갈 길을 열어 주셨죠. 하갈은 이스마엘을 데리고 바란 광야로 이주하게 됩니다. 바란 광야는 아브라함이 머물던 그랄과 애굽의 중간에 있는 곳입니다.
하갈이 애굽 쪽을 향해 가기는 했지만, 최종 목적지는 애굽이 아니었죠. 하갈의 과거가 애굽에서부터 시작됐어도 그녀는 과거에 머무를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내린 선택은 과거도 현재도 아닌 바란 광야였고, 이것이 곧 이스마엘 삶의 배경이 됐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그늘에도, 하갈의 그늘에도 머물지 않은 채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됐고, 그의 후손도 가 나안과 애굽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게 됐죠. 이 것이 롯과 이스마엘의 삶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차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창 21:30~31)
이스마엘이 떠난 뒤 아브라함은 이삭의 미래 준비에 착수합니다. 그 첫 번째가 이삭을 위한 땅을 마련하는 일이었죠. 아브라함이 평생토록 자기 소유 땅 없이 유랑생활을 했기에 이삭을 위한 터전 마련이 시급한 과제였죠. 때맞춰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서로 싸우지 말자는 협정을 맺자고 제안해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전에 아비멜렉 종들이 아브라함이 사용하는 우물을 빼앗은 일에 대한 해결을 요구했고, 아비멜렉이 이를 받아들여 우물에 대한 아브라함의 소유권을 정식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우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우물 주변 땅을 가진다는 의미이므로 브엘세바 땅이 아브라함 소유가 됐고,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예배드림으로써 하나님 은혜로 이 땅을 얻었음을 선포하게 됐죠. 아브라함에게는 갈대아 우르를 떠난 뒤 처음으로 생긴 자기 소유 땅이었습니다. 이삭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확실한 근거지가 마련되어 있다면 여기저기 떠돌며 살 필요도 없고, 재산도 점점 많아질 것이며, 자신처럼 아내를 동생이라고 속여 훗날 후회할 필요도 없겠죠. 그런데 이삭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땅이나 소유물, 안전 확보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물려주어야 할 진짜 유산이 무엇인지를 이어지는 22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