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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성경이 우리에게 오기까지(34)

조선의 “새빛” 선교사들

피터스 선교사는 제주에서의 짧은 체류를 가졌다. 그가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과 풍경은 분명 그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향한다.


얼핏 보면 아쉬운 장면이다. 어렵게 조선말을 배우고, 최초의 한글 구약 번역인 ‘시편촬요’까지 펴낸 그가 왜 태평양을 건넜을까? 혹시 조선에서의 사역이 지쳤던 것은 아닐까, 혹은 낯선 조선 생활을 견디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의 삶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피터스가 향한 곳은 미국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였다. 권서인으로서 조선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구약성경의 첫 한글 번역인 ‘시편 촬요’를 세상에 내놓았지만,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그에 대한 선교사 사회의 신뢰와 지지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마도 개인 스스로도 신학 교육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피터스는 신학 공부를 결심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당시 미국 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 Loomis)가 미국 성서공회 길만(Edward W. Gilman) 박사에게 보낸 서신에서 “피터스가 시카고에 가서 9월부터 신학을 공부할 것이며 그 후 정식 선교사로 한국에 다시 돌아올 계획”이라고 했다.


그가 한국을 떠난 시기는 제주도에서 돌아와 한양을 거친 1899년 5월 이후였다. 피터스가 입학한 학교는 일리노이주의 시카고에 소재한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였다. 맥코믹은 미국 장로교(PCUSA)에 소속된 주요 신학교 가운데 한 곳이다.


이 신학교는 1829년 인디애나주 하노버에서 ‘하노버 신학교’로 시작되어, 1859년 현재 시카고 링컨 파크로 이주했다. 이후 미국의 발명가 “사이러스 맥코믹”이 학교의 이사였고, 재정적 기여를 기리기 위해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됐다.


현재는 록펠러의 기부금으로 세우고, 전 세계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3번째로 많이 배출한 시카고대학교 옆에 소재하며 루터 신학교와 캠퍼스를 공유하고 있다.


또한 맥코믹신학교는 진보적인 신학적 관점을 지향하며, 사회 정의, 평화, 환경 문제 등 사회 참여와 다문화 세계 선교에도 적극적이다. 최근 2024년에는 전문 헤드헌팅 회사인 ‘아이작슨, 밀러’(Isaacson, Miller)의 자문을 거쳐 마이샤 I. 핸디(Maisha I. Handy) 박사를 제12대 총장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이처럼 역사가 깊은 맥코믹 신학교는 한국 선교 초창기 인재의 요람이었다. 1888년부터 1902년까지 이곳 출신의 내한 선교사는 14명에 달했다. 1884년부터 1910년까지 내한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166명 중 많은 이들이 이 맥코믹 신학교와 프린스턴 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출신으로, 한국 초기 교회의 신학적 토대를 형성하는 주류를 이뤘다.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다. 한국 교회의 뿌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평양대부흥운동과 사경회, 새벽기도와 같은 신앙 유산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배경에는 19세기 미국 장로교회가 형성해 온 신학적 전통과 선교 운동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미국 장로교회가 겪었던 구학파(Old School)와 신학파(New School) 논쟁은 훗날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들의 신학과 사역 방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1837년 미국 장로교회는 구학파와 신학파로 분열됐다.


구학파는 프린스턴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개혁주의 진영이었다. 찰스 하지와 애쉬벨 그린이 대표적인 인물이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기초한 정통 칼뱅주의를 옹호하고, 대각성 운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특히 이들은 성경의 권위와 교리적 정확성, 교회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다.


반면, 신학파는 예일 신학대학교와 레인 신학교를 중심으로 나다니엘 테일러, 라이먼 비쳐, 찰스 G. 피니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며,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을 계승하고 제2차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받아 부흥 운동과 선교, 사회개혁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신학파는 회중교회와 협력 관계를 지속하기도 하며, 변화하는 미국 사회 속에서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 논쟁을 단순히 보수와 진보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양측 모두 복음 전파와 교회의 성장을 원했다. 차이는 신학과 교회, 그리고 부흥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었다. 1869년 미국 장로교회는 다시 재통합됐다. 이것이 미국 연합 장로교회(PC-USA)다. 그리고 재통합 이후의 북장로교는 독특한 모습을 갖게 됐다. 신학적으로는 개혁주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선교와 전도에는 적극적인 복음주의적 열정을 함께 품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교회들이 조선에 선교사들을 파송했던 것이다.


조선에 온 선교사들 역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파송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신학을 가르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으며, 전국을 순회하며 전도했다.
<계속>

백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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