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예수의 세 번째 현현에서 부활의 예수와 베드로 사이의 대화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에서 ‘사랑하다’는 동사가 다르게 사용된 것에 관한 논란이 있다.
예수의 질문에서는‘아가파오’가 사용되었고 베드로의 대답에서는‘필레오’가 사용되었다. 두 동사의 성격을 다르게 보려는 사람들은 예수는 ‘아가파오’(하나님의 사랑, 희생)으로 질문했는데, 베드로는 ‘필레오’(인간의 사랑, 우정)으로 대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동사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은 인위적이다. 요한복음서 전체적으로 두 동사는 동의어적으로 사용되었다. 나사로 부활 사건에서 ‘필레오’는 나사로를 향한 예수의 사랑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11:3, 36).
예수는 첫째와 둘째 질문에서는‘아가파오’를 사용하지만, 그러나 세 번째 질문에서는 ‘필레오’를 사용한다(v.17). 베드로의 대답에는 항상 ‘필레오’가 사용되었으며 그 때마다 예수는 그의 어린양 혹은 그의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위임하셨다.
세 번째 질문에서 예수가 ‘필레오’를 사용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근심했다기보다는, 세 번씩이나 동일한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근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요한복음에서 ‘아가파오’와‘필레오’의 동의어적 사용의 예는 다음과 같다: (1) 아버지와 아들(3:35; 5;20);(2) 아버지와 제자들(14:25; 16:26); (3) 예수와 나사로(11:5;11:3); (4) 예수와 그 사랑 받은 제자(13;23; 20:2).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예수는 그에게 목자의 사명을주신다:“ 내어린 양을먹이라. ”목자의 사명과 관계된 동사가 교대로 사용된다: 먹이다(v.15); 치다(v.16); 먹이다(v.17). 두 동사도 약간의 의미상의 차이는 있지만, 여기서는 동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일세기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먹이다’를 음식의 공급(먹이다)으로 또 ‘치다’를 주권적인 돌봄(보살피다)으로 구분하지만, 그런 구분을 모든 경우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예수는 세 번째 말씀에서는 다시‘먹이다’를 사용한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선한 목자의 역할은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목자는 양들을 인도하며(10:3ff.) 또 꼴을 먹게 한다(10:9); 목자는 그들에게 생명을 주며(10:10), 또 그들을 보호한다(10:28). 두 동사는 요한복음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그것들은 합하여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위임한 목자의 통합적인 임무를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된다.
동일한 언어 사용이 베드로에게 맡겨진 양들에 관해서도 나타난다: 어린양(v.15); 양(v.16); 양(v.17). 사본에 따라, 어린양-중간양-양으로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런 엄밀한 구분보다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맡긴 사람들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은“내 양” 곧 “예수의 양들”이라는 것이 세 번이나 강조된다.
그들은 예수 안에서 생명을 얻고 그것을 풍성하게 누리도록 아버지께서 예수에게로 이끌어 오신 예수의 양들인데, 이제 예수는 그들을 베드로에게 맡긴다. 베드로는 예수의 양들을 맡은 목자로서 예수와 같은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는 예수와의 연합 속에서 그들을 생명의 꼴로 먹이며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내양을먹이라”는 세 번 째말씀은 선한 목자 강화의 배경이 되는 에스겔서의 구절과 거의 동일하다: “내가 내 양들을 먹일 것이다”(겔34:15 LXX). 이것은 예수가 그의 공생애에서 행사한 것과 동일하게 하나님이 위임하신 지도자의 임무를 베드로에게 수여한 것을 가리킨다.
예수의 두 번째 말씀은 첫 번째 말씀과 거의 동일하게 제시된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21:16). 앞 구절과 비교할 때, 이 구절에서 달라진 것은 예수의 위임에서 ‘치다’는 동사의 사용과 그 대상이‘양’으로 바뀐 것이다‘. 치다’는 동사가 계시록에서는 어린 양이 축복(7:17)과 승리(12:5; 19:15)로 통치하며 신실한 성도들이 그 속에 참여하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것은 초대교회 목자들의 임무를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다(행 20:28; 벧전 5:2). 또 그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목자’(목사)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다(엡 4:11). 그리스도는 목자장으로 간주되고(벧전 5:4), 또 목자로서 그의 역할은 감독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었다(벧전 2:25). 감독의 임무는 먹이고 인도하는 의미에서 양을 돌보는 것이다.
목자의 권위적인 지배와 군림은 회중의 목자에게 금지된다(벧전 5:3). 베드로는 예수의 양들이 생명의 꼴을 먹으며 성장하도록 돌보고 인도해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양떼에 대한 그 자신의 관심을 제시했다(10:3~4, 14, 27~30; 17:6, 9~12). 베드로는 주님의 양떼를 향한 그런 관심과 직분을 위임받은 것이다.
예수의 세 번째 말씀도 첫 번째와 두 번째와 약간 다른 부분이 있지만 중심적인 내용은 동일하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21:17). 저자는 세 번째 질문에서 사랑하다는 동사를 ‘필레오’로 바꾸어 두 번 사용했지만, 그 의미는 ‘아가파오’와 동일하다.
저자는 또“세 번째”라는 어구를 반복 사용하여 예수의 질문을 강조하며, 또 그것이 베드로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 것을 나타낸다‘. 근심하다’는동사는고별강화에서도 사용되었는데, 거기서 제자들의 근심은 예수의 떠남과 관계되었다(16:6, 20ff.). 베드로의 근심은 예수의 반복된 질문을 통하여 그가 받게 된 그 자신의 실패로 인한 수치와 아픔이었다. 베드로의 대답은 첫째와 둘째 대답과 두 가지점에서 달라진다: (1‘) 그렇습니다’가생략되고, (2)“당신이 모든 것을 아십니다”가 추가되었다.
두 개의 변화 모두 주 예수의 주권에 자기의 모든 것을 맡기는 베드로의 겸손한 태도를 나타낸다. 그는 주 예수를 향한 사랑에 대한 자기 평가와 자기 확신을 온전히 포기하고 모든 것을 아시며 주관하시는 은혜의 주님께 자기 자신을 맡긴다.
강조형 이인칭대명사가 반복적으로 사용된 것도 그가 주 예수에게 탄원하며 나아가는 것을 강조한다. 주 예수는 동일한 사명을 베드로에게 세 번째로 위임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실패를 완전히 용서한다. 베드로의 죽음에 관한 예언과 예수를 따르라는 초청이 베드로의 회복을 완결시킨다.
베드로에게 목자의 직분을 이양한 것은 초대교회의 직분에 관한 이해를 반영한다. 주님의 양떼를 치는 일은 교회의 지도자들인 감독들과 장로들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주님의 교회(행20:28) 혹은 하나님의 양떼(벧전 5:2) 안에서 그들의 직분을 행사하는 목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장으로서 그들의 봉사를 통하여 주님의 교회를 먹이고 인도하신다. 개교회의 지도자들은 목자장이 되시는 주님의 도우심 안에서 그들의 사역을 수행한다.
여기서 베드로가 예수의 전체 어린양들 혹은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의 직분을 받은 것이 독특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특출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마태도 베드로의 그런 특별한 위치를 전달한다(마16:18~19). 마태의 전승이 시리아 지역에서 발전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전승과는 독립적인 요한의 전승에도 역시 그것이 전달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예수는 베드로만을 목자로 세운 것은 아니다. 그 사랑 받은 제자도 역시 목자로 위임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은 베드로와 그 사랑 받은 제자 사이의 우열을 나타내려는 의도는 없다. 베드로와 그 사랑 받은 제자는 각각 교회를 향한 예수의 계획 속에서 서로 다른 역할과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김광수 교수 / 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