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 촌동네가 고향인데, 한두 시간 쯤 가면 바닷가가 있는 곳이었다. 좋은 학교도 못 나왔다. 식구도 많아서 다복하고 화목했지만, 가정 형편은 어려운 편이었다. 아마 아버지가 좀 일찍 세상을 떠나서, 장남인 그가 가장을 역할을 하며 가계를 꾸려나가야 했던 것 같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만, 좋은 학교를 다니지 못 하고, TV에 출연해 유명세를 타거나 따로 영재교육을 받지는 못했다. 중고등학교 다닐 나이인 10대나, 20대, 30대엔 무얼 했는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친구들 중에는 일찍 결혼하기도 했지만,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신앙생활을 잘 했다. 모태신자라고 할 수 있고, 교회 출석도 잘 했다. 성경공부도 열심히 했고, 기도생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새벽기도는 물론이고, 철야기도도 빠뜨리지 않았다.
수려하게 잘 생긴 편도 아니고, 이렇다 할 내놓을만한 반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며,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잘 하는 청년이었다. 고등학교나 제대로 나왔는지, 좋은 대학은 기대할 수도 없었다.
어느날, 침례를 받았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사람들 앞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신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고, 이단에 빠진 것이라고 염려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이 “선생님! 선생님!”이라고 불렀지만, 사실 그는 정식으로 교육부 임용고시를 치러서 교원자격증을 얻은 것도 아니었고, 공립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월급을 받는 교사도 아니었다.
빈터에 천막을 치고 야학을 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가르쳤고, 대안학교 같은 것을 운영했다. 그러니 생활이 어려웠고, 남들은 결혼해서 아파트를 장만하고 부동산 투기며, 주식을 한다고 하는데도, 단칸방을 얻을 형편도 못 되었다.
그래서 떠돌이처럼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그를 따르는 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교수법이나 내용에 있어서 탁월했다. 족집게 강사 이상으로 정곡을 찌르고, 시원시원했다. 또 잘 모르는 열심 있는 제자들은 남겨서 보충수업도 해 줬다. 그 선생님의 가르침은 국정교과서에만 얽매이지 않았다. 수시로 야외학습도 하고 실습교육도 했다.
자연으로 나가서 꽃도 보고 날아다니는 새도 보면서 함께 어우러져 먹고 마시며 뒹굴고, 하나님의 창조와 일하심을 온몸으로 느끼도록 했다. 정규학교에서 소외됐던 이들이, 이 대안학교에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가난한 그들은 큰 건물의 학교를 짓지 못하고, 여기저기로 떠돌며 먹고 자고 합숙훈련도 하며, 서로의 인생을 나누고, 인생을 배워갔다.
어떻게 살아야, 참으로 바르게 사는 삶인지? 과연 인간의 본 모습은 어떠한지? 무엇을 위해서 살며, 인생의 참된 가치는 무엇인지? 사람의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도 배워나갔다. 한솥밥을 먹으며 동고동락 하고, 학비도 안 받고 가르쳤다. 그러나 어떤 제자들은, 배우고 싶은 만큼 배우고, 얻어먹을 만큼 배부르게 얻어먹고는 조금만 손해나거나 부담거리가 생기면 떠나곤 했다.
자기 필요를 따라 이용할 뿐이었다. 처음에는 참으로 존경한다면서 열렬하게 따르다가는, 차츰 지각이 잦아지고 결석하다가, 온다 간다는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리곤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목숨 바쳐 평생 함께 하겠노라고 장담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며 목숨을 바치겠노라고 대통령에 출마하라고 부추기기도 했는데, 더 이상 자기에게 이익이 될 것 같지 않으면, 매정하게 돌아서는 한 순간이었다.
아! 무정! 이것이 인간사 세태란 말인가? 몇몇 의리 없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실, 그를 따르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다. 배신감에 몸을 떨며 원망하고 분통을 터뜨릴 만도 한데, 그 선생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사람들의 속성이란 원래 그런 것’임을 훤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이는 삿대질을 하며 대들기도 하고, 오해를 하고, 비난을 일삼기도 했다.
그러나 믿을만한 제자가 아주 없진 않았다. 그들은 신실하게 선생님을 따르며, 가르침을 배웠다. 물론 그 선생님의 가르침에 완전히 동화되지는 못했지만, 자기 꿍꿍이속이 영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순수하게 따르려고 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처음에는 열렬히 지지했지만, 점차 회의가 들고,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든 제자가 있었다.
세상의 법칙에서 어제의 전우는 오늘의 적이 될 수도 있는 법! 그는 선생을 매장시켜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반대파와 결탁을 했다. 반도체 연구실에서 설계도를 몰래 빼내서 경쟁회사에 팔아먹듯, 검은 계약서를 쓰고 배신을 했다. 그래서 그 선생님은 누명을 뒤집어쓰고 구속됐다.
그러나 검찰의 강도 높은 밤샘 조사에도 무혐의였다. 하지만 그는 풀려나지 못했다. 대중을 선동하는 무리들의 여론 조작과, 정치검사들에 의해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결국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여론은 그를 죽이기에 바빴다. 그리하여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최후 진술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같이 사형을 당했던 앞뒤의 흉악범들은, 형틀에 묶인 채로 억울하다고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 쳤다. 심지어 그 선생님을 향하여 악담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그것을 자기 사명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여 “내 할 몫은 다했다”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들이 아직 철이 안 들고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 용서해 달라”며 평화로운 얼굴로 마지막 길을 갔다. 그렇다고 당장에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추앙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동조하면 어떤 불이익이 닥칠지 몰라서 쉬쉬하며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진리와 진실은 그렇게 묻혀버리지만은 않는 것이었다. 그분의 생애는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분신자살한 후에, 열사(烈士)로 받들어진 전태일! 하지만, 그 선생님의 삶은, 전태일의 삶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분의 영향을 받고, 그의 사상, 이념, 아니 그것을 뛰어넘는 생명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분이 본을 보이고 이룬 삶을, 이젠 자신들의 인생을 내던져서, 제자가 되기를 자원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들에게 별명을 붙여줬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저 사람들은 자기 선생인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우리가 직접 그 선생인 예수 그리스도를 본 적은 없지만, 이들을 보면 그 선생이 어떤 분인지 충분히 알 수 있겠노라고! 아! 오늘 나도 그분을 따르며, 제자다운 제자가 되고 싶다.
김효현 목사 / 늘푸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