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집에서 키우는 애완동물에 대한 개념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좀 적적하거나 동물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집에서 동물을 키웠고, 그런 동물이 언제부터인가 크기와 관계없이 집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들과 같이 먹고 자게 되었습니다. 거의 자식같이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이제는 애완동물이라는 말을 거의 안쓰고, “반려동물”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하도 사람 대하듯 하고, 동물 이름에도 자기 집 성을 갖다 붙여주는 사람들까지 있다 보니 동물들이 자기가 사람인줄로 착각하는 일이 적지 않을 것 같다고 혀를 차는 분들도 있습니다. 거기다 이제는 동물학대방지법 같은 것도 있어서 자기 소유의 동물이라고 해도 밥을 제대로 안주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하면 법에 저촉되어 처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 반려 동물의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개와 고양이입니다. 전통적으로 개는 사람 가까이서 살아왔고, 종자가 개량되어 크기가 작아지고 대소변을 가리는 훈련이 되어지면서 일찍부터 실내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파트 공동생활이 많아지면서 개가 짖는 소리가 적잖은 민원을 발생시키고 이웃 간의 불화를 조장하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고양이를 기르는 집이 많아졌습니다. 고양이는 소리 내어 심하게 짖는 일도 없고, 때를 따라 사람들에게 폭풍 애교도 부리고, 지 성질 따라 삐지기도 잘하지만, 조금만 좋아지면 가까이 와서 친한 척을 합니다.
저희 집 아이들이 키우는 고양이는 100마리 중 한 두 마리 정도 있다는 “민감 고양이”로, 까칠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 “코리아 숏 헤어”종 고양이인데, 그래도 애들한테 만큼은 시시때때로 애정공세를 줄기차게 해댑니다. 물론 아빠인 저한테는 “하악질”(성질났다는 표시로 “하악”소리를 내는 행동)을 해대고 물고 할퀴지만 그래도 지 성질이 풀리면 괜히 와서 친한 척하고 툭툭 건드리고 그럽니다.
언젠가 인터넷을 보니까 그런 고양이들의 언어를 분석해서 설명해놓은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고양이를 관찰해온 전문가들이, 고양이들이 어떤 특징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게 어떤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라고 분석을 해서 정리를 한 것입니다. 그걸 보면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은 그런 기사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 집 고양이를 잘 키우려고 합니다.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냥 아주 애정이 절절 흘러넘칩니다. 고양이와 놀다가 손에 온통 발톱자국, 이빨자국이 있으면서도 고양이의 편의를 위해 소위 “집사”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보면, 하나님 생각이 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와 비교할 수 있는 분이 아니지만, 스바냐 3:17절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하시는 말씀을 보면, 아무리 주인에게 까칠해도 무한 사랑을 받는 고양이처럼, 그저 이쁘게 보시고, 조금이라도 기특한 일을 하면 그걸 크게 보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꼭 고양이 키우는 집사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반을 걱정하지 않으시고 절대적이고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 그러다 한번만 이쁜 짓을 해도 평생에 은혜를 거두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 하나님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눈과 마음을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가지게 하시고, 먼저 믿은 교회의 어른 들에게 주시고, 항상 교회에서 새 힘과 은혜로 무장하고 세상을 향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주십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라고 말하는 어느 기독교 대학의 홍보 카피처럼 지치지 않는 사랑으로 세상을 향해 친절하고 오래 참는 눈으로 바라봐주는, 그리고 그들의 변화와 구원을 위해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을 기쁨으로 쏟아낼 수 있는, 사람 좋은,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들로 까칠한 세상 사람들에게도 인정받는 능력있는 기독신앙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배동훈 목사 / 남성대교회, 침례교 군목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