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에서 ‘심판’의 개념은 현재의 결단에 종속된다. 이 시대가 종말의 시작이라는 내용을 포함하면서도, 그 종말의 결과에 대한 강조는 부분적이다. 즉, 베드로의 요엘서 인용(2:16~21)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선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새로운 시대는 궁극적으로 종말을 지향하면서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설교이다. 요엘의 예언 성취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는 성령의 강림에 따른 선포와 더불어 성령의 영원성과도 관련되며, 이 영원성을 가진 성령시대가 이미 시작된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심판’은 현재를 위한 결단의 촉구 의미를 내포한다. 장차 도래할 종말의 시대를 전제로 하는 성령시대는 종국적인 심판의 서곡이다. 이에 따라 바울은 “의, 절제, 장차 올 심판을 강론”한다(24:25)<고넬료의 사건에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재판장’이란 표현 속에 내포한다(“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이 표현도 현재적인 구원의 견인과 관련된다.>. 심판은 종말을 전제로 현재적인 구원에 대한 선포로 기능하는 것이다.
IV. 예수: 구원의 본질
구원의 본질은 무엇인가? 구원의 지향점은 어디이며 그 결과는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 사도행전은 이와 관련하여 ‘예수’ 자체를 강조한다. 예수가 구원의 본질이며, 이 예수와의 관계 형성의 상태가 구원임을 밝힌다. 체화된 구원의 다양한 선포는 한결같이 예수를 그 중심축으로 삼아 예수를 신학적으로, 상황적으로 해석해서 구주로 선포하는 것이다.
1. 주, 예수, 그리스도, 임금, 구주
승천 이후의 예수는 복음서의 예수와는 그 기능성에서 구별된다. 그렇다고 해도 성령을 통한 예수의 영속성과 지속성은 그의 그리스도이심이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도록 만든다. 유대 종교와 헬라-로마 문화권에서 예수를 규정하는 다양한 칭호가 등장한다. 이 칭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고백하며 선포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와 ‘그리스도’는 서로 다른 개념을 내포하면서 동시에 상호 균형을 이루는 기독론적 칭호로 기능한다<‘그리스도인’ 칭호는 그리스도인이 유대교의 계승이 아니라 유대교로부터 분리된 새로운 집단을 형성한 것을 의미한다. 이 칭호는 그 내면에 예수의 정체를 내포하면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을 지칭한다(11:26; 26:28). cf. 벧전 4:16. 이 칭호의 신학적인 기능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김선배,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유대교와 구별되는 기독교,” 복음과 실천 50 (2012 가을): 54-5; 그리스도인 칭호는 사회적, 인종적 편견이 배제되고 다양한 구성원들이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평등하게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Stephen J. Strauss, “The Significance of Acts 11:26 for the Church at Antioch and Today,” Bibliotheca Sacra, vol. 168 (July-September 2011): 283-300.>.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 또는 ‘예수는 주시다’는 표현은 하나의 고백이며 선포이다.
사도행전은 예수를 세속적 통치자에게 적용하는 ‘임금’과 ‘구주’로도 표현한다(5:30~31).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수단으로, 로마 황제를 비교점으로 삼는 ‘임금’과 ‘구주’라는 선언이다. 이 칭호는 예수 자체가 누구인지를 사회적으로 설명하는 칭호이며, 이와 병행해서 예수를 복음서의 전승을 승계하는 초월적 존재로도 선포하면서 예수의 정체에 대해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균형을 갖추어 제시한다(9:20).
예수에 대한 다양한 칭호는 예수 사건과 통합적이다. 비록 성령시대를 전제로 하는 사도행전이지만,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선언은 증언의 핵심이며, 예수를 수식하는 다른 용어들을 배제할 경우에도 선포의 핵심이다. 예수의 생애의 어떤 한 부분, 이를테면, 수난, 죽음, 부활, 승천 등의 어떤 한 과정이 아니라 그의 사역 전체가 한 묶음으로 구원과 관련된다. 사도행전의 구원은 다른 부차적인 또는 전제가 되는 행위가 아니라 바로 예수(의 인격) 자체와 직접 연결된다(2:21; 4;12; 13;23; 16:31)<Jervell, 사도행전신학, 155.>. 사도행전은 ‘예수’와 이 예수에게 발생한 사건을 엮어서 전하지만, 예수를 둘러싼 사건의 진행보다는 그 사건을 귀속하는 예수를 증언한다(cf. 17:18).
2. ‘주의 이름’
사도행전의 ‘이름’은 ‘예수’와 일치된다(cf. 눅 21:12). 이 이름은 ‘예수,’ ‘예수 그리스도,’ ‘주,’ ‘나의,’ ‘그’ 등의 수식어로 연결되거나 또는 독자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예수 그리스도의 이름(2:38; 8:12; 10:48; 15:25-26; 16:18); 주 예수의 이름(8:16; 9:29: 19:5, 13, 17); 주의 이름(2:21; 9:14; 22:16); 내 이름(9:15, 16);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3:6; 4:10); 나사렛 예수의 이름(26:9); 예수의 이름(4:18; 4:30; 5:40; 9:27); 그 이름(3:16; 5:41; 10:43);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4:7);
김선배 교수침신대 신학과(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