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가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유럽, 미국, 호주 등 전 세계적으로 동성애 합법화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며 고착되는 상황이다. 특히 미국 문화가 마치 기독교 문화처럼 인식되는 세계의 흐름에서 동성애가 기독교 문화로 오인되면서 기독교는 타락한 퇴폐 문화의 상징으로 비추어져 선교에도 큰 저해 요소가 될 수 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연방 대법원의 동성결혼 합헌 결정을 축하하며 백악관을 무지개색 조명으로 밝힌 것은 홍수 심판 후의 무지개를 떠올리게 하면서 다가오는 이 세상의 심판을 실감하게 한다. 미국의 문화와 사상의 영향, 미국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의 영향에 취약한 우리의 현실은 이러한 타락의 문화를 빠르게 흡수하여 확산시킬 우려할만한 상황이다.
이런 사회적인 상황에서 일부 기독교인이나, 기독교 단체들이 동성애를 심리학적, 생물학적 요인으로 간주하며 동성애를 정당화한다. 동성애를 성적 취향의 차이로 규정하면서 서로 다른 개인의 취향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소위 차별금지를 주장하며 사실상 동성애를 조장하는 것이다. 심지어 동성애 옹호가 마치 지성적이며, 인간에 대한 관용과 사랑의 척도인 것처럼 동성애 비판을 비판하거나 침묵으로 동조하기도 한다. 동성애를 비판하는 것을 마치 사람에 대해 관용적이지 못하거나 반지성적인 신앙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복음적’이라는 교단과 교회, 영향력 있는 위치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동성애에 대해 무반응이나 의도적인 무관심의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동성애는 죄악의 표출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주저하지 말고 동성애의 배후에 있는 어둠의 영과 영적 전투를 해야 한다.
동성애 문제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상황의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를 동성애 문제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의 사회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다원화 현상과 종교다원주의가 어떻게 동성애와 관련되는지를 파악하고, 이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동성애의 원인을 신앙적인 문제에서 찾으며, 동성애를 그 원인부터 치유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볼 것이다.
1. 창조주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신약교회는 그 시대 사람들의 종교관을 어떻게 직시하고 복음으로 해석하며 대응했을까? 신약성경은 헬라-로마의 문화적인 배경을 어떻게 도구로 활용하여 복음을 전했을까? 신약성경이 형성되던 시대는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가 폭넓게 퍼져있던 종교다원주의 상황이었다. 신약시대의 분위기에서 단 한 분의 신을 섬긴다는 것은 무신론을 의미할 정도로 다신교가 성행했다. 그리스도인이 당연하게 여기는 유일신관이 오히려 충격적인 사상이었다. 유일신을 섬긴다는 것은 당시의 지성적인 분위기에서 이해할 수 없는 반 지성이었다. 여러 신을 섬기던 신전인 로마의 판데온(Pantheon, 만신전)이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가 만연했던 상황을 반영한다. 이러한 사상은 로마인들에게 생활이고 문화였다.
초대교회는 복음전파 과정에서 다신교나 종교혼합주의 영향을 치열하게 극복해 나갔다. 당시의 사회에서 유행하던 풍조에 맞서는 새로운 사상은 투쟁을 수반한다. 복음은 이러한 문화 투쟁과 사상의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었다. 로마 황제 숭배에 대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존중하는 분위기는 로마의 체제에 위협이 되지 않는 한 허용되었다. 로마에 대한 충성의 표시인 로마 황제 숭배는 로마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정치 행위였다. 비록 정치 행위가 제의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종교적으로 여러 신을 섬기는 사회에서 추가로 로마 황제를 숭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앙인들에게 로마 황제 숭배가 정치 행위인지 아니면 종교 행위인지는 당시의 세계에서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후일에 명확하게 보이는 일도 당시의 시점에는 구분하기 어려운 예도 있고,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다. 아무튼, 그리스도인은 정치적으로, 신앙적으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풍토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끊임없는 저항과 정화를 실천하며 극복해야 했다. 비록 로마 황제 숭배가 하나의 정치 행위일지라도, 또 여러 신 가운데 하나의 신이라고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다신교 문화와 싸워야 했다.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와 같은 당시 세계의 보편적인 상식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이러한 극복의 환경은 구약성경에도 제시된다.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던 다신교와의 싸움이 창세기 1장 1절에 반영되어 있다. 이 구절은 유일한 하나님을 선포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과정을 설명하기보다는 누가 천지를 창조했는지를 선포하는 내용이다. 즉,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고백적 표현이 창세기의 창조 기사이다. 많은 신을 숭배하던 고대 세계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며 최고의 신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창조 기사이다. 예수님이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라는 주장을 펴는 신약성경의 골로새서도 이처럼 당시 세계의 사상적인 분위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창조와 연결하여 설명한다(골 1:16; 참조, 요 1:1~3).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는 당시 세계의 다신교 및 종교혼합주의와 충돌했다. 여러 신 가운데 또 다른 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을 배제하며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복음선포는 당시의 세계에서 혁명적인 내용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선포는 단지 종교성을 넘어서는 문화투쟁이기도 하다. 다양성 존중이란 명목의 다신교 문화와 근원적인 죄와 그 결과에 대한 영적 투쟁인 것이다. 결국, 복음선포는 유일한 구원의 길과 여러 구원의 길과의 충돌이며, 종교다원주의 문화와의 충돌이다. 복음은 이 충돌을 뚫고 진군하며 유일한 구원의 통로를 만들어 나간다.
2. 동성애의 뿌리, 종교다원주의
어떤 이유로 동성애의 뿌리가 종교다원주의인가? 종교다원주의의 원형은 무엇인가? 종교다원주의는 이 시대의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사상이다. 바울이 ‘하나님을 떠난 죄’로 분류하는 우상숭배는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를 아우르는 표현이다. 창세기에 반영되어 있고, 신약시대에도 유행했던 다신교와 종교혼합주의를 우리 시대에는 ‘종교다원주의’라고 부른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상호 존중하자는 행위를 종교에 대입한 것이 종교다원주의이다. 어떤 면에서 자유로운 사회에서 서로 간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인권이며, 사랑의 실천이며, 평화와 공존의 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식당에서 한 끼 식사하면서 짜장면과 짬뽕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지 고르는 것과 같은 기호의 차이가 아니다. 생명의 문제이다. 종교다원주의자는 인권, 대화, 평등, 평화, 사랑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주장을 편다. 달리 말하면, 각 종교는 각각 나름대로 구원의 통로가 있으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신들(gods)이 구원의 길을 다르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여러 종교에서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이 다르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같은 지점을 지향한다는 주장이다. 이와 관련한 종교다원주의자들의 비유가 있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등산로가 여러 개 있듯이 구원의 길도 그렇다는 것이다. 각각의 등산로를 통해서 정상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시간과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목적지는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에서는 오직 예수를 통해서, 불교에서는 오직 부처를 통해서, 이슬람에서는 오직 알라를 통해서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 즉, 종교다원주의는 다원적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를 확대하면 이단들의 교주를 통해서도 구원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절대성을 배제하고 종교의 상대성을 주장하면서 크게는 종교통합이나 통일을 이루자는 사상이다. 복음 전파의 금지나 전도의 무용성이 나오는 이유이다.
구원의 다원성을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에는 함정이 있다. ‘오직 예수’라는 주장의 함정이다. 종교다원주의자가 유일신을 주장하는 것은 기독교 안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일 뿐이다. 만일 이들이 기독교(예수)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기독교 밖에서는 예수의 구원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오직 예수를 통한 구원은 그 내면에 오직 기독교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하나의 등산로를 택했으면 그 방향에서는 오직 그 등산로를 통해서만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맥락과 같다. 그러나 산은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지만, 구원의 길은 한 번으로 끝나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등산과 구원은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종교다원주의는 여러 구원의 통로는 서로 차이가 있지만 본질은 같다는 주장 속에서 종교 간의 공존과 평화를 위한 사랑과 대화를 주장하면서 사회의 지성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세력을 확장한다.
그렇다면 종교다원주의와 동성애는 실제로 어떤 관련성을 가질까? 종교다원주의의 다양성 존중은 결국에는 성적 취향의 다양성 존중으로 이어진다. 여러 종교의 공존과 같은 여러 성적 취향의 공존이 종교다원주의 사상 속에서 평등의 이름으로 녹아있다. 성적 취향의 차이를 인정하자는 주장은 종교다원주의의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인 국가나 사회는 자연스럽게 그 열매가 되는 동성애를 지지하고 조장하는 사회로 바뀌는 것이다. 결국, 동성애의 뿌리는 종교다원주의이며, 종교다원주의는 성경의 관점에서 우상숭배를 인정하는 사상이다. 우상숭배의 결과 중에 하나가 동성애이며, 그래서 로마서는 동성애가 근원적인 죄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죄’인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의 결과로 규정한다.
(계속)
/ 김선배 교수 침신대 신학과 (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