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살던 고장에는 산우리, 새신바우, 안골, 장수바우, 아치나리, 방갓, 여우골, 거촌, 무섬 등의 마을과 지역 이름이 있었다. ‘산우리’는 산울타리라는 의미, 거촌(居村)은 사람이 사는 마을, 장수바우는 마을 입구 언덕에 큰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 아치나리는 작은 시내를 뜻한다.
방갓은 상중(喪中)에 있는 사람이 부모를 여윈 죄인으로서 하늘을 볼 수 없다 해서 일정 기간 쓰고 다니던 대나무를 쪼개 만든 삿갓이다. 방갓은 방갓장이들이 모여 살면서 생긴 마을일 것이다. 무섬은 마을 둘레로 물이 돌아나가는 ‘물돌이 섬[마을]’이라는 뜻인데 한자를 병용하면서 수도리(水島里)가 됐다.
일찍이 설총의 이두(吏讀, 또는 鄕札)의 영향을 받아 땅과 마을 이름이 많이 변형되었으나 지명의 차음(借音)과 차훈(借訓)을 따라서 양지마을을 양촌리(陽村里)로, 음지마을을 음촌리(陰村里)로 바꾸고, 까마귀고개, 또는 까막재는 까마귀 오(烏) 자와 고개 현(峴) 자를 써서 오현(고개)라고 쓰는 등 이해하기는 좀 어려워도 본뜻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는데 일본어식 표기가 사용되면서부터는 의미가 전도(顚倒) 되는 경우가 많았다.
뜻이 뒤바뀐 땅 이름
작은 논(땅)을 일컫는 한배미의 ‘배미’를 ‘밤’으로 알고 대야(大夜)라 하거나, 큰배미의 ‘배미’를 ‘뱀’이라고 생각하고 대사(大蛇)로, 널배미를 ‘날아다니는 뱀’이라고 생각하고 비사(飛蛇)로 표기한 것은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애앗, 아지, 아차는 작은 것을 가리킨다. 작은 산은 아차산, 낮은 고개는 애앗 고개, 작은 시내는 앗시내, 아시내, 또는 아치나리라 했다. 오래 전 대학 은사 부인의 함자(銜字)가 ‘손아지’인 분이 있었다. 이름의 뜻을 잘 모른 지인들과 학생들이 가끔 ‘송아지, 송아지’ 하며 웃기도 했다. 그러나 ‘아지’는 새끼, 또는 작고 아담하다는 의미의 고운 우리말이다.
큰 무덤이나 산꼭대기 무덤을 ‘마루무덤’이라 했는데 그것이 말 무덤으로 둔갑해서 마총(馬塚)이 되고, 큰 마을 ‘감실’이 감곡(甘谷)으로 바뀌고, 가까이라는 뜻의 ‘솔안’이 송내(松內)로, 절벽을 뜻하는 ‘벼랑바우’가 벼락바우가 되어 뇌암(雷岩)으로 표기된 것은 심각한 현상이다(배용호 참조). 노룻재, 노루목은 노루가 다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낮고 완만한 고개를 말한다. 닭뫼, 쪽들, 까막재, 나뭇골, 숯골 같은 이름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교회 이름은 대게 지역 이름을 따서 지으면서도 양짓말, 노루목, 산우리 같은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해오름, 늘푸른, 한마음, 목동, 은총교회 등 의미 깊고 아름다운 이름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