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남부지방의 침례교인들 사이에서 “지계석주의”(Landmarkism) 운동이 유행했었는데, 이 운동의 주창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가 바로 침례교회였으며, 그 분이 받고 베푸신 침수례(Immersion Baptism)가 교회역사 상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침례교회 전승설”(Baptist Church Successionism)이라고 부르는데, 이 학설에 의하면 침례교회는 종교개혁 이전에도 존재해 왔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아니라고 하였다. 20세기초까지도 이 학설이 침례교인들 사이에서는 통설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전세계 침례교 신학계에서나 역사학계에서 객관적이고 건전한 이론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서적 아나뱁티스트운동을 비롯한 근원적 종교개혁이 종교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이해되어야 하듯이, 아나뱁티스트들을 넘어서는 침례교운동 역시도 종교개혁운동의 한 지류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침례교회 역시 종교개혁운동의 한 결실이며,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개신교회)들 가운데 하나이고, 유아세례와 국가교회체제를 거부하는 자유교회운동에서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교회인 것이다.
2. 초창기 침례교운동의 성격
17세기초에 시작된 초창기 침례교운동(Early Baptist Movement) 역시 종교개혁운동의 일환이었지만, 루터나 깔뱅이나 쯔빙글리나 영국국교회 개혁가들 등 주류종교개혁가들(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의 개혁운동과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침례교운동 역시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의 산물이었다는 점이다.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이 유아세례 전통을 계승하고 국교체제의 기독교를 지향했던 루터나 깔뱅이나 쯔빙글리를 넘어서는 개혁을 주창했다면, 침례교운동은 세상과 세속정부에 대해 적대적이고 소극적이었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을 넘어서서, 보다 더 신약성서적인 교회를 지향했던 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00여년 전까지는 침례교회 전승설(Baptist Church Successionism)이 영국과 미국의 침례교회에서 통설로 인정되었지만 이제는 학술적인 이론으로서는 이미 폐기된 학설이다.
예수님이 지상에 세우셨던 교회가 침례교회였으며, 그 교회가 초대교회 때부터 로마가톨릭 교회가 지배했던 중세시대를 거쳐 역사상에 지속적으로 존속해 왔고, 따라서 그 교회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아니다는 주장(침례교회 전승설)은 역사적 문헌적 증거에 근거한 이론이라고 볼 수 없다. 침례교회는 종교개혁시대(1517~1648)의 말미인 17세기 초에 영국 분리주의자들에 의해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세우고자 하셨던 신약성서적인 교회(New Testament Church)를 이상으로 하여 그러한 교회를 회복하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둘째로, 침례교운동은 일종의 대중운동이었다는 점이다. 루터교회나 개혁교회는 루터나 멜랑크톤, 그리고 깔뱅과 쯔빙글리같은 위대한 개혁가나 개혁신학자에 의해 창도된 개혁운동이었다면, 침례교회는 신약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도하셨던 교회의 참 모습을 발견해 내고, 그것을 17세기 당시에 회복 혹은 재현하려고 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대중적인 개혁운동이었다.
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피신을 와서 유럽대륙에서 발생했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메노나이트들)과 접촉을 했고 신앙적인 교류를 했던 것을 부인할 수 없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영국에서는 윌리암 틴데일에 의해 번역된 영어 신약성경(NT, 1525)이나 “위대한 성경”(The Great Bible, 1539)이나 킹 제임스 버전 영어성경(KJV, 1611)이 지성인들 사이에서 두루 읽혀지고 있었다. 신약성경에서 계시된 교회와 당시의 영국국교회의 모습을 비교해 보고,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영국국교회를 떠나 독립된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확신을 하게 된 평범한 사람들(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침례교회는 지상에 탄생하게 된 것이다.
셋째로, 침례교운동은 처음부터 지역교회의 자치권과 민주적 회중정치의 원리에 입각하여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스마이드 일행이 암스테르담에서 아나뱁티스트들의 “신자의 뱁티즘” 행습을 보고 그것을 채택하기 이전에, 이미 그들은 게인즈보로 교회라고 하는 분리주의자 교회를 이루었는데, 이 교회는 영국국교회로부터 뛰쳐나온 독립된 자치적인 회중이었다.
스마이드를 담임목사로 청빙한 것도, 암스테르담으로 집단이주할 것을 결정한 것도, “신자의 뱁티즘”을 채택하여 새로운 교회를 시작한 것도, 회중의 자치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약성서에는 지역교회들 위에 군림하면서 그 교회들을 지휘하거나 통치하거나 치리하는 상부기관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모든 신자들의 공동체인 우주적 교회(Universal Church) 개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상에 지방회니 노회니 연합회니 선교단체니 연회니 총회니 하는 기구들이 없었다. 오늘날 지역교회들 간의 교제와 협력을 위하여 이러한 기구들의 필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기구들은 어디까지나 지역교회와 그 사역을 돕기 위해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었다.
침례교운동은 처음부터 지역교회를 중심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민주적 회중정치”(Christ-centered Democratic Congregationalism)를 원칙으로 하는 교회행정으로 시작되었다. 침례교운동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궁극적인 주인이자 유일한 중보자로 믿는 믿음에서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성직계급제도(Priestly Hierachy)나 성직자중심주의(Sacerdotalism)를 배격하였다.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교회회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각종 사역의 수행을 위해 적극적인 참여를 하도록 권장했던 운동이었다.
넷째로, 침례교운동은 종교의 자유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국교체제의 기독교가 아닌 자유교회)를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신자들의 영적인 공동체”(Spiritual Body of Believers)여야 한다는 확신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네덜란드 아나뱁티스트들의 영향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신약성경에서 발견해 낸 신앙원리였다. 교회와 국가가 긴밀하게 결탁되었던 로마가톨릭 교회의 유산인 유아세례 전통을 초창기 침례교 개척자들은 과감하게 배격하였고, 교회는 세속국가나 권력기관과는 무관한 신약성서적 교회, 다시 말하면 콘스탄틴 황제의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 313) 이전의 순수했던 교회를 회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초창기 침례교 개척자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교의 자유”(Religious Freedom for All)를 이상으로 하여 세속권력자들은 인간 내면의 종교나 신앙이나 양심의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침례교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사함과 구원을 받는 유일한 길임을 고집스럽게 믿지만, 동시에 불신자들과 다른 종교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