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마땅히 축복받아야 할 존재다. 비난받아 마땅한 존재가 절대로 아니다. 그 어느 누구라도, 그 어떤 실수와 잘못을 했더라도 그러하다. 그러니 남편이 아내에 대하여, 아내가 남편에 대하여, 부모가 자녀에 대하여, 자녀가 부모에 대하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의미있는 타자’(significant others)의 말 한마디는 가히 절대적이다. 이삭의 아들 에서가 동생에게 빼앗긴 아버지의 축복을 뒤늦게라도 되돌려 달라 호소한 것도 바로 그 때문. 그저 축복만이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후 가장 먼저 하신 일도 그들을 풍성하게 축복하신 일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축복은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최초의 약속이며, 명령이자 선물이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역시도 하나님은 먼저 축복하셨다. 그 다음 사명을 맡기셨다. 그러므로 축복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임이 분명하다.
특히 축복을 확실히 받아야 할 인생의 일곱 시기,
1. 아이를 가질 때, 2. 임신했을 때, 3. 태어났을 때, 4. 어릴 때, 5. 사춘기 때, 6. 결혼할 때, 7. 노년의 때는 더 없이 중요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임신되는 순간’에는 “우리가 너를 원하며 태어날 날을 큰 기쁨으로 기다린다. 너의 부모는 합법적 결혼 관계이므로 욕정이 아닌 사랑으로 너를 잉태시키려 한다”는 내용으로 축복해주어야 한다. ‘태중에 있을 때’에는 “우리는 너를 기다리며, 엄마의 배가 불러가는 모습이 너무나 좋고, 최선을 다해 너를 태중에서 양육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축복해주어야 한다.
‘태어난 순간’에는 “하나님 창조하신 그대로 너의 성별을 기쁨으로 받는다”는 내용으로 축복해주어야 하고, ‘영유아기’에는 충분한 신체접촉을 해주며, “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공급하겠노라”는 약속으로 축복해야 하며, ‘사춘기 때’에는 아이의 생각 기분 경험을 자유롭게 얘기하게 하면서 끊임없는 가능성을 축복해주어야 한다. ‘결혼할 때’에는 “사위나 며느리 등을 새로운 가족으로 기쁘게 수용하며, 영적 정신적으로 기꺼이 떠나보낸다”는 것으로 축복해주어야 하고, ‘노년의 때’ 역시 “당신은 여전히 필요한 존재이며,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있고, 많은 의미있는 일들을 이루셨다”는 것으로 축복해드려야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는 그런 축복을 적기(適期)에 주지 못했다. 아니 받지도 못했다. 그런 축복이 필요한지도 몰랐다. 오히려 그 대상의 정체성과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알려주는 ‘축복’보다, 사탄의 마음과 생각을 알려주는 ‘저주’를 더 퍼부었다. 그의 외모와 성품과 능력과 행동에 대한 평가만을 끝없이 반복하였다. 그러다보니 그 존재의 소중함마저 다 망가뜨렸다.
그래서 인간은 끝없이 목마르다. 채워지지 않는 축복으로 인해 불행하다. 무엇을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작은 것 앞에서도 두려워하며, 자기 삶의 목적과 비전도 찾지 못하고, 타인과의 관계도 잘 맺지 못한다. 주님 주신 풍성한 삶 역시 누리지 못한다. 자꾸 엉뚱한 방법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한다. 외모나 능력으로만 가치를 인정받으려 한다. 인간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존귀한 존재인데 말이다. 이 모두가 다 축복의 가뭄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만약 당신이 부모라면 자녀에게 축복을 시작하자. 자녀를 향한 사탄의 마음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자. “난 너를 사랑해. 난 너를 축복해. 네가 자랑스러워. 넌 여전히 소중하고 가치있어. 네가 뭘 하든지, 순종하든지 안하든지 널 향한 내 마음은 변함이 없어. 너는 잘 될 거야. 사람들도 너를 좋아하게 될 거야. 성공할 거야. 회복될 거야. 두려워마.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잖아. 너를 굳세게 하실 거야. 그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영원히 붙드실 거야.” 그러니 성도를 향한 목회자의 태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목회자는 무조건 성도를 축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