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르고 애굽으로 돌아온 요셉의 형제들은 불안하고 두려워했습니다(창50:14). 그것은 40년 전에 자기들이 요셉에게 저지를 악한 일에 대해(창37:18~28) 요셉이 복수를 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까지 들먹이며 용서해달라고 엎드려 빌었습니다(창50:16~18).
그런데 형들의 기우와는 달리 요셉은 형들에게 놀라운 관용을 베풀고 용서를 했습니다(창50:19~21). 요셉도 인간인데 왜 형들의 한 짓이 밉지 않았겠습니까? 40년 전에 요셉을 죽이려고 깊은 웅덩이에 빠뜨릴 때 요셉이 매달리며 살려달라고 애걸을 했건만 몰인정하게 죽음의 구덩이에 빠뜨렸던 형들이 아닙니까?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는 그 날을 생각할 때마다 치가 떨리는 사건인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훗날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의 섭리였음을 깨달으면서 형들을 도구로 쓰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임을 알고(창45:5)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가 있었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도 어떤 일이나 사건으로 말미암아 가슴에 박힌 상처와 고통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아픔도 악을 선으로 바꾸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며 거기에 관계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도구라고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창50:20). 하나님은 반전의 대가이십니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며 고난도 즐거움이 되게 하시고 문제 속에서 축복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깨닫고 보니까 과거에 미운 짓을 했던 그 형들이 불쌍해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용서를 구하는 그들의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눈물의 사람입니다. 그는 자주 울었습니다. 형들을 만날 때에도 요셉은 툭하면 우는 광경을 보여줍니다(창42:24, 43:30, 45:1~2, 14~15, 46:29). 요셉은 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은 자기는 눈물이 없다고 은근히 자랑삼아 얘기하는 것을 보는데 그 사람은 잘못된 사람입니다. 냉정하고 몰인정하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물샘을 주신 것을 울라고 하신 건데 울지 못하는 것을 비정상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잠깐 교만에 빠져서 죽을 병이 걸렸을 때, 낯을 벽으로 향하고 눈물로 간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셔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느니라 내가 네게 15년을 더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38:1~5).
하나님은 눈물에 약하십니다. 그 눈물은 진정성이 담긴 회개나 감사의 눈물일 경우를 말합니다. 눈물에 용서가 있고 관용이 있으며 하나됨이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목회한 것을 기억해달라고 에베소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교제할 때에 고백했습니다(행20:31). 기도의 사람인 바울 사도는 사실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히5:7에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죄가 없으신 우리 주님도 눈물로 기도를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죄가 없으신 우리 주님도 눈물로 기도를 올리셨는데 죄인의 괴수와 다를 바가 없는 우리는 날마다 때마다 울며 기도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는 눈물을 잃어버렸습니다. 죄를 짓고도 울지 못하고 은혜를 받고도 감사의 눈물을 드리지 못하며 주님을 떠나서 방황하고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눈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건강을 잃는 것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흘려야 할 눈물을 잃고 있음을 더 부끄럽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오늘날 강단에 이 눈물이 사라진 것을 봅니다. 나의 눈에 눈물의 기도가 사라지고 영적쇼그랜증후군(눈물을 흘리지 못하는 병) 환자처럼 눈물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모임 가운데 웃음도 있고 화려한 퍼포먼스도 있으며 세련되고 다양하게 의식이 드려지는 예배는 많으나 진정한 회개와 감사, 용서와 은혜의 눈물은 많이 흐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제가 관용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잃어버린 눈물을 회복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