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전혀 새롭게 출발해야 했다. “의로운 해”(righteous Sun, 말 4:2)가 떠올라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 했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신 것이다. 태양이 중천에 떠오르면 밤의 어둠을 밝히던 야등들은 빛을 잃어 버린다. 구약의 야등들은 신약의 태양,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더 이상 빛을 발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유산으로 그리고 성령님의 강림하심으로, 이 지상에 교회가 비로소 출현한 것이다. 교회가 신약의 산물이라고 할 때, 구약성서보다는 신약성서에 우선적인 권위를 두고 교회론(ecclesiology)을 정립해야 신학적인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서를 통하지 않고 곧바로 구약성서를 해석하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적인 이단들이 발생하고 있다. 기독교는 기독(基督), 즉 그리스도를 믿는 종교이다. 그리스도는 구약성서에는 암시적으로 비유적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신약성서와 복음서들에는 이 땅에 성육신하신 그 분의 삶과 가르침이 생생하게 소개되고 있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Magisterial Reformers, 주류종교개혁가들, Mainstream Reformers)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16세기 당시의 교회를 신약성서적 교회로 회복시키는데 철저하지도 못했고 완전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개혁은 “아직도 미완성인 종교개혁”(김승진, “제9장 아직도 미완성인 종교개혁,” 「종교개혁가들과 개혁의 현장들: 아직도 미완성인 종교개혁」, 서울: 나침반출판사, 2015, 319-49.)이 되고 말았다. 프랭클린 리텔은 필립 샤프(Philip Schaff)를 인용하면서,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과 근원적 종교개혁가들(Radical Reformers) 간의 기본적인 교회 개념의 차이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Franklin Hamlin Littell, ‘Introduction: A Working Definition of Anabaptist,’ The Anabaptist View of the Church (Boston: Starr King Press, 1958), xviii.):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성서에 의해서’ 옛 교회를 개혁하려고 하였지만, 근원적 종교개혁가들은 ‘성서로부터’ 새 교회를 세우려고 시도하였다(The reformers aimed to reform the old Church ‘by the Bible’; the radicals attempted to build a new Church ‘from the Bible’).”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은 “성서를 가지고”(with the Bible)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를 많은 부분들에서 개혁(reform)은 했지만, 그들이 개혁한 교회가 충분히 “성서로”(to the Bible) 회복(restore)은 이루어지게 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신약성서적 교회로의 파격적인 회복(restitution) 혹은 철저한 환원(restoration)을 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루터와 쯔빙글리와 칼빈 등 주류종교개혁가들의 종교개혁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16세기라는 시대의 아들들”(sons of the 16th century)로서의 한계이기도 했다. 그들이 당시의 세속권력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했던 것이다.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의 의식 속에는 로마가톨릭적인 잔재들과 구약성서적인 요소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구약성서적인 신정정치적(theocratic) 개혁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라든지, 유아세례를 구약의 할례(circumcision)와 연결시킨 것이라든지, 주의 만찬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성례전주의”(sacramentalism)적인 요소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중세의 로마가톨릭교회와 신약성서적 교회 사이에서 어정쩡한 타협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콘스탄틴에 의한 기독교의 공인(313년)과 그로 말미암은 “정치와 종교의 종합”(synthesis) 혹은 “국가와 교회의 공생”(symbiosis)을 교회 타락의 시발점(始發点)으로 보았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의 역사적 안목은 정확한 것이었다. 유아세례가 국가와 교회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신자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불신자들까지도 함께 공존하는 기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세상과 교회의 담이 허물어져 버렸고 교회는 점차 세속화되어 계급과 지위와 세속적 명예와 부와 권력을 향유하기 위한 다툼의 장이 되어 버렸다. 교회당(church building)은 으리으리한 자태를 가지게 되었으나, 정작 예수님이 세우셨던 순수한 참 교회(true church, Rechte Kirche)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신약성서에는 그 어디에도 교회당을 교회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종교개혁기에, 참 교회는 신자들만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신자들에게만 베푸는 뱁티즘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이야말로, 당시의 교회를 신약성서적인 교회(New Testament Church)로 회복시키고자 했던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로마가톨릭 교회는 물론이요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가들로부터도 이단자(heretics)라는 낙인이 찍혔으며 그들의 성서적 신앙으로 말미암아 엄청난 고난과 참혹한 핍박을 당해야 했다. 그들은 800-1000년 동안 교회 내에서 관습적으로 행해져 왔던 유아세례 전통에 대해 과감하게 도전장을 던진 사람들이었다. 1525년 1월 21일 밤에 펠릭스 만쯔(Felix Manz)의 집에서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이 게오르게 블라우락(George Blaurock)에게 “그의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물을 머리에 부음으로써 행했던 신자의 뱁티즘은 근대적인 의미의 “자유교회운동”(Free Church Movement) 혹은 “신자들의 교회운동”(Believers’ Church Movement)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들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이 침례교회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이들이 침례교회의 신앙과 영성에 끼친 영적 감화력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들이 네델란드와 영국 땅에 은밀히 잠입하여 아나뱁티스트 신앙을 유포하였고, 이들의 신앙적 영향력은 당시 영국 땅에서 일고 있던 청교도 운동(Puritanism)과 분리주의 운동(English Separatism)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하였다.
자유교회 전통의 관점에서 볼 때, 루터와 쯔빙글리와 깔뱅 그리고 영국국교회 등의 주류종교개혁(Mainstream Reformation)은 당시의 교회를 충분히 신약성서적 교회로 회복시키지 못하고 그 양자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을 이루고 있는 “반(半)혁명적 종교개혁”(Half-revolutionized Reformation) 혹은 “과도기적 종교개혁”(Transitional Reformation)이었다고 진단할 수 있다. 16~17세기 유럽 땅 어느 곳에서도 핍박의 위협 없이 편안하게 예배를 드릴 수 없었던 아나뱁티스트들의 신앙이, 오늘날 교회와 국가의 분리, 신앙과 양심의 자유, 신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등과 같은 복음주의적 기독교 신앙가치로 인정받고 있음을 볼 때, 시대를 앞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받는 핍박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역사적 교훈으로 받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성서적 아나뱁티스트들의 역사는 비로소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이야기”(Now it can be told Story)가 되었다.
침례교 신앙의 특징이나 침례교회의 특징을 한 마디로 단정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17세기초 유럽대륙의 한 모퉁이(화란과 영국)에서 시작된 침례교운동은 처음부터 정형화된 신학체계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이었다. 기존의 신학과 교리체계나 교권체제로부터 뛰쳐나와서 스스로 성경에서 발견한 신앙과 생활 원리를 따르고자 추구했던 사람들이었다.
영국국교회(Anglican Church, 오늘날의 성공회)가 비록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개혁된 교회이긴 했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로마가톨릭적 잔재를 가지고 있었고, 신약성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서적이지 못한 신앙행습들을 가지고 있었던 점을 비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영국국교회와는 분리된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것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침례교인들이었다. 따라서 초창기 침례교인들은 미리 정해 놓은 신학체계나 교리체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성경, 특히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신앙과 삶의 원리를 발견하고 그 원리에 충실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기본적으로 침례교회는 자유교회운동의 흐름 속에 있는 교회이다.
자유교회란, 무엇보다도 교회는 세속국가와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 교회다. 다른 말로 하면 국교체제의 기독교가 아니라 국가의 개입이나 간섭을 배제하고 오직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순수한 교회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교회는 어디까지나 신자들의 공동체이어야 하며, 따라서 유아세례(infant baptism)를 부정하고 신자들에게만 뱁티즘을 베푸는(believer's baptism) 교회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믿고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가 섬길 교회를 선택하는 교회이어야 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침례교회는 “회원교회”(Membership Church)이다. 유아세례를 행하는 전통을 가진 교회는 일반적으로 국가교회(State Church) 혹은 교구교회(Parish Church)의 체제 속에 있던 교회였다. 따라서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비자발적으로”(involuntarily) 부모가 속해 있던 교회의 회원이 되었다. 유아세례는 대표적인 “대리종교”(proxy religion)의 한 모습인데, 신약성서는 기본적으로 대리종교를 배격한다. 부모가 믿음을 가졌거나 어떤 교회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죄사함 받을 필요성이나 구원 받을 필요성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없는 갓난아기나 어린아이에게 뱁티즘을 베푸는 것은 신약성서적이지 않다. 부모의 믿음에 근거하여 부모를 대리하여 갓난아기나 어린아이에게 뱁티즘을 베푸는 것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어불성설이다. 또한 유아세례는 교회와 국가 혹은 종교와 정치를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하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행정관청에 “출생신고”를 하고 동시에 그 행정관청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국교체제의 교구교회(parish church)에서 유아세례를 받음으로 “교적신고”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유교회에서는 영적 출생의 경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중생(regeneration, born-again)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의 자발성(voluntarism)에 근거하여 자신이 속하고 섬길 교회를 택하여 그 교회에 가입하여 회원이 되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침례교인들은 신조(Creed)나 신경을 배격하면서 신앙고백(Confession)을 강조했던 사람들이다. 침례교회의 역사 속에서 침례교인들은 다양한 신앙고백들을 만들어 냈다. 신앙고백이 시대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달랐기 때문에 침례교 신앙 속에는 다양성(diversity)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기본적으로 인정을 하면서도 무오성, 영감성, 성경해석 등에 관하여 침례교인들은 다양한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침례나 주의 만찬에 관해서도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강조점이 조금씩 달랐다. 침례교 신앙은 획일화된 교리체계나 어떤 위대한 인간(개혁가나 신학자나 목회자)이 만들어낸 신학체계를 배격하다 보니 자연히 다양성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