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을 위해 부르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마11:28~30)

  • 등록 2016.10.06 15:4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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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의 묵상-32

하루를 지내다보면 가장 많이 오는 메일이 스팸메일이고 다음이 여행안내 메일입니다. 그것은 현대인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연휴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을 위해 국내외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OECD국가 중에서 11년 연속 자살률이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루 평균 40명이 자살하고 매 30분마다 한명씩 삶을 포기한다는 통계는 인간 스스로의 의 한계가 무엇인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에서 최우선적인 주님의 부르심은 와서 쉬라는 초청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주님위해 일하다가 지치고 때로는 병까지 얻기도 하며 낙심하고 불평하며 심지어 주님 곁을 떠나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참된 평안과 쉼을 위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주님만이 어떤 경우와 처지에서도 결코 고갈되지 않는 무궁무진하신 참된 인격을 소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삶에 지친 우리에게 평안과 쉼을 제공하시기 위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필요한 쉼을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조차도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 삶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수고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갑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주님 곁에 가기만 하면 결코 지치지 않는 을 제공받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구원의 쉼을 제공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원칙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은 그 누구도 주님께서 주시는 완벽한 을 누릴 수 없다는 원칙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그분의 제자가 될 때 우리는 쉼의 평안을 제공받게 됩니다. 그런데 쉼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메라고 하신 주님의 멍에를 메야 합니다. 이 원리 안에서 죄와 삶의 무게로 지친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을 얻게 되며 더 나아가 주님과 매일의 관계 안에서 더 깊은 쉼과 평안을 지속적으로 누리게 됩니다.


이란 구원 안에서만 제공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고 그 지도자들마다 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지만 그곳에 참 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유일한 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있습니다. 주님만이 내게로 오라고 초청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초청은 주님의 부르심인 동시에 명령입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은 수렁으로 가득한 늪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주님께 가까이 갈 때만 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부르심은 신학적 담론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초청은 기관이나 조직, 예배가 아니라 우리 개개인입니다. 분문의 세 구절 가운데서 주님은 내게, 내가, 나는, 나의라는 대명사를 사용하시면서 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음을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 자기 삶의 의미를 부여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일은 저마다 자기 삶에 무게를 더할 뿐입니다. 그러다 힘들면 종교의 힘을 빌려서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해보려 하지만(23:4) 종교적인 열심이 도리어 자기 삶에 무게를 더하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인간이란 영혼의 쉼이 없는 한 참된 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구원은 은혜를 먼저 경험해야만 참 쉼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순종 안에서만 쉼을 제공하십니다.

구원은 우리를 모든 죄책감과 억눌림과 불안에서 자유와 쉼을 제공하지만 우리가 주님께 온전히 순종할 때에 더 깊고 안전한 쉼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주권자가 되심을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누릴 평안에는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메라고 하신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멍에는 자유를 구속하며 을 앗아갑니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 자유란 없습니다, 그것은 허상입니다. “자유란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멍에의 이미는 계명, 명령, 의무를 말합니다. 주님의 멍에란 곧 주님의 계명과 명령 그리고 로서 의무를 말합니다.”  행글라이더를 등에 지고 창공을 나르면 행글라이더는 더 이상 무게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 몸을 저 높은 창공에서 마음껏 활공하게 해 줍니다.


우리 주님께서 메라고 하신 멍에는 단순 명료합니다. 우리에게 주님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을 대변하는 정의로움으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그것은 온유와 겸손이 아닙니다. 온유와 겸손은 우리 주님의 본성이십니다. 우리는 이 귀한 가치를 배워야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을 계속 누리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온유와 겸손의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방법을 우리에게 한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부활안에서 온유와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 을 누립시다.

  이정일 목사 / 청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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