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 전인 1997년 한국 갤럽은 개신교회를 다니다가 다니지 않게 된 사람이 무려 1,000만 명에 달한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표했다. 이는 국민 5명 중 1명은 교회에 다녔다는 말하고 기독교의 구원관에 대해 무엇인지 최소한 들어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최근 2014년도 조사에 의하면 비종교인의 호감 종교로 불교 25%, 천주교 18%, 개신교는 10%에 그치고 있다. 200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 조사 자료에 의하면 기독교인의 숫자는 1,200만 명이 아닌 861만 명인 것이 확인됐다.
그 후 매년 교단 총회에 보고되는 교인들의 숫자는 해마다 수십만 명씩 줄어드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실제로 한국사회를 돌아보면 기독교가 쇠퇴할 때 불교와 천주교는 오히려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개신교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신천지와 같은 이단에 미혹되어 간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또한 국내외 유명한 목사님들 중에 불교나 다른 종교에도 마치 구원이 있다는 뉘앙스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구원론에 큰 오류가 있음을 보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제일 좋아하는 말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이 와전되어 ‘무조건 은혜,’ ‘무조건 믿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죄사함만 받으면 이후로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이 이미 구원이 완성됐다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믿음과 행함은 반대 개념이 아니다.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이분법에 매몰되어 “믿음으로 구원받느냐?” 아니면 “행함으로 구원받느냐?”라는 논쟁이 지속적으로 교회안팎에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 믿음은 있지만, 행함이 없고, 행함은 있지만 믿음이 없는 신앙 형태는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믿음’의 개념을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완성되는 구원의 역사로 이해하지 못하고 피조물의 내적심리 상태로만 보는 잘못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믿음이 있으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삶은 따라오게 된다. 삶이 없으면 야고보 사도의 말씀처럼 죽은 믿음인 것이다. 목회현장에서 믿음에 대한 성도들의 이해가 자신들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잔해하던 그 믿음,’ 곧 미워했던 예수에게서 발견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믿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게 됐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고 성령과도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역사하시는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전통적인 입장에서의 구원론과 새 관점주의자들의 입장에서의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비교 연구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은 어느 교파의 교리나 어느 신학자의 한 가지 관점으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오히려 종합적이고 통전적인 입장에서 고찰할 때 갈라디아서가 말하고 있는 구원관을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을 신론, 기독론, 성령론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보고 또 언약적, 교회론적, 종말론적 입장의 종합적인 관점에서 갈라디아서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목회를 하면서 터득된 방식이다. 성도들이 이러한 구원론을 갖게 될 때 성령이 역사하시는 믿음과 분명한 교회관을 갖고, 충성하는 삶과 세상에서 사망을 이기고 만물을 복종시키는 생명력 넘치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국 침례교회는 교리나 신학이 없다는 말이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구원론에 대하여 연구할수록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어느 교단의 교리나 신학자의 관점에 다 담을 수는 없다는 결론을 갖게 된다. 만약에 하나의 관점만 가지고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론의 전부라고 한다면 엄청난 오해와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증명됐다.
오히려 종합적인 관점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론을 있는 그대로 전해주고 삶으로 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침례교 정신에 맞는 것이라 생각한다.
갈라디아서의 구원론에 관한 또 하나의 연구 동기는 침례신학대학교 장동수 교수의 “갈라디아서의 성령론”을 읽으면서 갈라디아서의 새로운 연구방식에 대한관점과 그 가능성을 알게 되면서 비롯됐다.
최근에 들어와서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갈라디아서 전반부)에서보다는 ‘성령의 사역’(갈라디아서 후반부)에 초점을 맞추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고든 D. 피(Gorden D. Fee), 데이비드 J. 럴(David J. Lull), 찰스 H. 코스그레이브(Charles H. Cosgrave), 왈터 보 러셀(Walter Bo Russell), 토마스 A. 렌드(Thomas A. Rand) 등의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의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특히 피(Fee)는 이신칭의의 전통적 해석과는 달리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주된 역할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바울은 자신이 체험하고 이해하는 영 안에서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 그 실상을 더 완전한 형태로 묘사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능력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임재이신 성령을 통해 시작하고, 계속 이어지며, 마지막 날 그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신칭의’는 갈라디아서의 구원의 전체가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 오히려 구원의 중심적인 부분은 성령의 사역으로 인한 ‘그리스도의 몸’(교회)으로 세워져서 완성되는 부분에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갈라디아서는 전반부보다는 후반부를, 그리고 ‘이신칭의’보다는 구원의 전과정(칭의, 성화, 영화)에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2장의 이신칭의보다도 3장부터 6장에 이르는 성령으로 진리에 순종하여 의의 소망을 이루는 삶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사역’이 구원론과 더 연결되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통전적 의미를 긍정할 것이다.
김종이 목사 / 성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