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과의 실전 : 그리스도의 신성으로 급소를 공격하라-2

  • 등록 2017.11.02 10: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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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진리를 말씀으로 증명하라)
방은수 목사의 신학의 변

그런데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대속 제물은 죄가 없는 존재여야 한다는 율법의 요구가 있다. 마태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이 예수라는 분이 이 요구를 충족시키신 분이라는 것을 증명할 것인가? 더 나아가서 마태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마리아가 낳은 이 아들이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이라고 증언하고 있는가? 그 예수가 장성해 놀라운 기사와 표적들을 행하였기 때문인가?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옳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를 오래 따라다니더니 제자들을 대표해서 그분께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 고백을 가야바의 뜰에서 완벽하게 뒤집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붙잡히실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아예 주님을 버리고 도망갔던 마태는 무슨 근거로 사7:14의 “임마누엘”이 바로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나사렛 예수라고 말할 수 있었는가? 그 해답은 그 예수가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을 그가 직접 만나 보았다는 사실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가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그 임마누엘이라고 주장하는 복음서를 마태가 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가 그분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마 28:1~10, 16~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마 28:19)
이 말씀은 사9:6의 신적 칭호들과 연관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의 중요성은 하나님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그 대신에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세 칭호로 나눠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 칭호들이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리스도께서 항상 자기 하나님께 대해 사용해 오셨던 칭호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대해서도 친히 여러 번 언급하셨고 자세히 가르쳐 주신 적도(요14~16장)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의 결론인 끝 부분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하는 “아들”이라는 호칭을 아버지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과 더불어 동급의 이름으로 올려놓고 함께 묶어서 나열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 산헤드린이 예수를 신성 모독죄로 처형했음에도 불구하고 마태는 잘못하면 신성 모독죄로 처형당할 수도 있었던 이런 주장을 어떻게 책으로까지 낼 수 있었는가? 그 해답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마태가 직접 만나 뵈었다는 사실 밖에서는 찾을 수 없다. 마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나사렛 예수께서 자신이 여러 차례 예언하신대로 그리고 구약에 예언된 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예수가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던 것이다.


한편 마28:19의 원문을 살펴보면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가 아니라 “이름 속으로 침수시키고(침수례를 행하고)”라는 언뜻 이해가 잘 되지 않는 표현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원문에는 삼위의 호칭들이 속격의 형태로 한 이름에 각개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말씀의 뒷부분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아버지의, 그리고 아들의, 그리고 성령의 이름 속으로 그들을 침수시키면서(빠뜨리면서=침수례를 행하면서),” 이 표현은 “baptizoo”라는 동사가 원래 “빠뜨리다, 잠그다”라는 뜻이며 따라서 속으로라는 전치사가 필요한 것을 모르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호칭들은 주격이 아니라 속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말로 모두 “의”가 붙어 있다. 세 분(three persons)을 하나로 합쳐서 한 이름 속으로 침수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따로 구별되어 있는 채로 각각의 이름 속으로 집어넣으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의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세 분이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시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느끼게 만든다.


순서만 구별될 뿐이지 “그 이름”에 연결된 속격 명사들이 속격 관사를 모자처럼 쓰고 “그리고”로 연결되어 나란히 손을 잡고 단상에 서 있는 세 사람처럼 열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세 위”(three persons)로 존재하심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전에도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똑같이 공경을 받아야 한다”와 같은 말씀들을 종종 하셨지만 그동안 “관계성” 속에서 사용하시던 “아들”과 “아버지”라는 호칭을 부활하신 후에는 “신적 지위” 속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는 “명칭”으로 삼으신 것이다. 이처럼 마28:19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확실한 성경적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확립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구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누가는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주”시라고 기록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정되신(롬1:4) 후 몇 십 년이 지난 후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유대인으로 오셨던 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인류의 “구원자와 주인”이신 것을 누가가 이방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눅2:11~12)
<계속>


방은수 목사 천북신흥교회

관리자 기자 bpress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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