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복음과 초대교회의 본고장 ‘터키’로!-4

청빈의 의무를 다한 크리스소톰 대주교

지나치게 공부를 많이 한 탓에 건강이 나빠지자 안디옥로 돌아온 그는 381년 멜레티우스주교에 의해 부제서품을 받았고 곧이어 386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12년 동안 안디옥 교회에서 사목활동을 했다.

 

387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즉위 10주년을 맞아 안디옥에 특별세가 부과되자, 시민들이 납세거부 투쟁을 일으켰는데 시민들은 테오도시우스와 그 가족의 석상을 부수고 공중목욕탕을 파괴했다. 이때의 납세거부 투쟁은 요한의 부추김을 받은 것이었는데, 결국 안디옥 당국의 과잉 진압으로 참혹한 학살극으로 끝나는 결과를 낳았다.

 

398년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로 추대됐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도 그는 공부를 많이 한 신학자다운 특유의 명쾌한 설교와 강의로 그 곳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권력자와 부자들의 사치와 인색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예언자적인 설교를 하였기 때문에 많은 물의를 일으켰고, 적도 많이 만들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적은 바로 동로마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황후인 아일리아 에우독시아였다. 에우독시아는 사치스럽고 방탕한 행실로 크리소스톰 대주교에게 공공연하게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크리소스톰 대주교를 제거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청빈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하고, 그의 감독을 받는 사제, 수녀, 수사들은 모두 독신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한 강직하고 까다로운 성격은 알렉산드리아 대주교인 테오필루스와도 불화를 일으켰다. 403년 테오필루스는 오크 회의에서 그와 설전을 벌였다. 회의에서 그는 여러가지 죄목으로 요한을 기소했는데, 정작 요한이 출두하지 않자 그를 단죄한 뒤 대주교직에서 면직시켜 버렸다. 이를 기회로 유독시아는 남편 아르카디우스를 부추겨 그를 비티니아로 유배시켰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그들이 존경하는 요한을 대주교가 유배되자 폭동을 일으켰고, 테오필루스의 지지자들과 충돌했다. 그 날 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진이 일어나고 에우독시아가 유산을 하자 황제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러나 이후 에우독시아의 은상(銀像)을 둘러싸고 다시 황후와 요한 대주교는 대립했고 결국 다음 해에 벌어진 종교회의에서 요한 대주교는 다시 추방당했다.

 

대주교는 유배를 떠나기 직전, 교황 인노첸시오 1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교황은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 이 사태에 개입을 시도했다. 호노리우스와 교황은 아르카디우스를 압박하여 크리스소톰 대주교를 돕고자 했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응하지 않았다.

 

406년 서방 황제와 교황은 대표단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파견했으나 아르카디우스는 이들을 도시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고 감금한 후 이탈리아로 다시 돌려보냈다. 407년 가을, 요한은 소아시아 폰투스의 외딴 유배지에서 죽었다.

 

그의 설교를 보면, “지금 지니고 있는 것을 잃지 않으려거든, 그것을 남들과 나누라거나, “그리스도의 제대가 금으로 된 잔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그리스도께서 굶주림으로 돌아가신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라는 설교처럼 부자들의 인색함과 사치를 비판하는 내용이 있다.

 

한편 교회가 세속화 되고, 집단 개종이 일어나서 교회가 교회되지 못하고 있을 때 사우디아라비아 반도에서 모하메드가 이슬람 신앙을 일으킨다. 그의 사후(AD.632) 25년 되었을 때 이슬람의 정복은 이집트, 북아프리카,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까지 퍼져 나갔으며 1세기 후에는 러시아와 스페인에까지 이르게 됐다.

 

한때 이슬람 군대와 충돌했던 터키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이슬람은 더욱 큰 세계 종교가 된다. 터키족은 6세기 들어서면서 역사에 등장한다. 흔히 중국사가들은 이들을 돌궐이라 불렀다. 족장인 셀주크를 시조로 하는 이슬람화된 터키족은11세기 중반에 이란의 영토를 중심으로 대 셀주크 왕조를 세우고, 족장인 투으룰베이는 이슬람의 대표인 술탄의 공식 명칭을 얻었다.

 

술탕에 오른 알프 아르슬란이 이끄는 셀주크 군은 아니톨리아(우리가 말하는 소아시아’)에 진출하여 1071년 반 호수 동쪽의 만지케르트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을 격투 시킨다. 아르슬란은 본거지인 이란으로 철수했으나, 터키족의 일부는 셀주크 왕가의 황태자를 왕으로 추대하고, 왕국을 설립해 로마령에 속한 셀주크라는 의미의 룸 셀주크라고도 한다.

 

12세기에 들어서 이란의 셀주크는 사실상 멸망했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셀주크는 13세기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기 까지 소아시아에 남아 있었다. 이 시기에 우리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에게 빼앗겨 버린 성지를 탈환한다는 목표 아래 1096년에 시작되어 대략 2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십자군 전쟁을 시도했던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을 차츰 타락의 길로 빠지게 되고, 4차 십자군은 셀주크 터키와의 전쟁이 아닌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하여 비잔틴 제국을 멸망하게 한다. 기독교인이 기독교 국가를 멸망시킨 것이다. 비잔틴은 일시 맥이 끊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라틴제국을 물리쳐 50년 만에 비잔틴 제국을 재부흥시킨다. <다음에 계속>

 

엄 폴 선교사 / 침례교해외선교회



배너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