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중반부터 타 교단에서부터 여성 목사 안수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여성 목회자들의 활동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교단 내의 일부의 교회들도 여성을 목사나 사역자로 임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 당시의 가정을 포함한 사회 변화와 교회 안에서의 성평등과 여권 신장의 영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갑작스러운 문화⋅사회 변화에 교단 내의 지도자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후반(정확히는 1979년 근본주의자들이 총회를 장악)부터 2000년 전까지 교단 내에서 벌어졌던 보수주의 근본주의자들과 보수주의 온건주의자들의 싸움에서 근본주의자들이 승리하여 교권을 장악함으로써 여성의 사역과 역할에 큰 영향을 끼치며 변화를 가져왔다. 보수주의 근본주의자들은 성서 무오성과 전통적인 성서해석을 고수해 여성 목사 안수 및 사역을 거부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보수주의 온건주의자들은 대표적인 침례교 전통 가운데 하나인 지역교회의 자율성을 강조하여 여성 목사 안수 허용과 사역의 문제를 지역교회가 결정하도록 했다. 나름 균형 잡혀 보였던 교단의 양 세력의 균형이 1984년 총회에서 대의원들이 여성목사 안수 금지를 결정함으로써 무너지기 시작했다. 물론 이 결의안은 각
최근 ㈜지앤컴리서치가 조사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 결과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현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9%에 그친 반면,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5.4%에 달했다. 신뢰와 불신의 격차는 56.4%포인트에 이른다. 이는 단순한 호감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를 향한 구조적 불신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에 갑자기 나타난 현상도 아니다. 조사 추이를 보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는 몇 차례의 조사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으며, 뚜렷한 반등 없이 감소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는 특정 사건이나 논란 때문이라기보다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점차 굳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 내부에서는 여전히 교회 성장이나 교세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사회가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이미 다른 차원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교회 조직뿐 아니라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과 신자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같은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조사에서는 목회자의 말과 행동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73.7%로 나타났으며, 개신교인의 말과 행동 역시 불신 응답이 7
최근 ㈜지앤컴리서치가 조사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조사 결과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현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9%에 그친 반면,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75.4%에 달했다. 신뢰와 불신의 격차는 56.4%포인트에 이른다. 이는 단순한 호감도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를 향한 구조적 불신이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에 갑자기 나타난 현상도 아니다. 조사 추이를 보면 한국교회에 대한 신뢰는 몇 차례의 조사에서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으며, 뚜렷한 반등 없이 감소세가 이어지고 있다. 이는 특정 사건이나 논란 때문이라기보다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점차 굳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교회 내부에서는 여전히 교회 성장이나 교세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사회가 바라보는 한국교회의 이미지는 이미 다른 차원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눈여겨볼 부분은 교회 조직뿐 아니라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과 신자들의 행동에 대해서도 같은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조사에서는 목회자의 말과 행동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73.7%로 나타났으며, 개신교인의 말과 행동 역시 불신 응답이 7
처음부터 조선의 왕이 적색 곤룡포를 입은 것은 아니다. 이성계의 어진을 보면 청색 곤룡포를 입고 있었다. 이는 당시 명나라가 조선을 완전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권지고려국사(임시로 고려를 다스리는 사람)’라는 직책만 내렸던 굴욕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이후 태종 1년(1401) 정식 책봉이 이뤄지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세종실록”에서 세종 26년(1444)에 ‘대홍직금곤룡포’가 등장한다. ‘홍직(紅織)’은 적색으로 짰다는 뜻이다. 이 무렵부터 적색 곤룡포가 제도적으로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왜 고종(조선 26대)은 황색 곤룡포를 입게 됐을까? 1894~1895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승리하게 됐다.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더욱 약화시키기를 원했다. 이런 이유로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고종이 황제로 즉위했을 때, 황색 곤룡포의 착용을 허용했던 것이다. 이는 외교 질서의 변화와 함께 상징 체계도 재편되었음을 보여준다. 권력은 색으로도 드러난다. 그러나 색이 바뀌었다고 권력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곤룡포는 권위의 상징이었지만, 단종의 비극이 보여주듯 권력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 조선의 왕이 입던 곤룡포는 단순한 왕의
본보가 지령 1600호를 맞이했다. 창간 이후 71년 동안 본보는 침례 교회가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는 현장을 지켜왔다. 교단과 기관, 지방회와 연합회, 그리고 개교회가 협력하는 사역의 ‘바로미터’를 제시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위대한 명령을 수행해 왔다.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도 본보는 침례교 정체성을 수호하는 파수꾼이자, 전국 3500여 교회를 하나로 묶는 영적 가교 역할을 멈추지 않았다. 지나온 길에는 폐간의 아픔과 재정적 위기 등 잊을 수 없는 고비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례교 가족들의 애정 어린 사랑과 기도, 물질의 후원은 본보의 문서 사역을 끊임없이 이어가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 숭고한 헌신을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그동안 본보를 위해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신 모든 교회와 목회 동역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본연의 사명이 있으며, 이를 완수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고 있다. 영혼 구령을 향한 열정을 잃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교회가 목회를 포기하지 않도록 조력하며, 이웃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전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왔다. 이제 침례 교회는 새로운 도전과 기회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 그 중에서 고고학박물관에 가신다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사람 아닌 사람이 있다. 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사람 모양의 토관들이다. 이 유물은 지금부터 3300~31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이용한 것이다. 그 사람들의 관이 오늘날 팔레스타인 가자에 있는 텔 테이르 엘-발라(tel Deir el-Balah)에서 1967년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유명한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모세 다얀(Moshe Dayan)이 개인적으로 무단 발굴해 소장했다가 1981년 박물관에 기증․판매된 ‘다얀 컬렉션’의 일부이다. 이 토관은 보통 사람 키보다 크고(160~195cm), 이집트 오시리스 수염과 팔 모양을 한 모습으로 마치 이집트 미라를 위한 관 모양과 유사한데 관 안에서는 고인의 유골과 함께 사후 세계에서 사용할 토기, 장신구, 청동거울, 무기 등이 함께 발견됐다. 이 토관의 주인공들에 대한 규명은 명확하지는 않다. 이집트 사람과 밀접한 교류 지역이니 이집트 사람일수도 있고, 아니면 이집트 장례문화의 영향을 받은 블레셋 사람 또는 가나안 사람일 수도 있다. 아직 DNA분석까지 했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 그런데 고고학 박물관에 갈 때마다
피터스 선교사가 머물렀던 제주도는 오랫동안 ‘유배의 섬’으로 불렸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중앙 정치에서 밀려난 인물들이 이곳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육지와 떨어진 지리적 특성은 감시와 통제를 용이하게 했다. 조선의 15대 왕 광해군도 인조반정 이후 제주로 유배되어 생을 마쳤다. 이렇게 제주는 중앙 권력의 끝자락이자, 권력에서 밀려난 자들의 종착지였다. 최근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왕과 같이 사는 남자”는 6대 임금 단종의 비극을 다시 소환했다. 단종은 1452년 12세(10세)에 즉위했으나, 숙부 수양대군이 주도한 계유정난(1453년)으로 1455년 왕위를 빼앗겼다. 이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고, 1457년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했다. 이 영화의 감독 장항준은 왜 수양대군(훗날 세조)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가 등장하면 악역 한명회의 무게가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는 서사의 집중을 위한 영리한 선택이다. 이렇게 단순해야 힘이 있다. 단순하다는 것은 메시지를 한 지점에 모으는 일이다. 설교와 강의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내용을 나열한다고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핵심에 집중할 때 설득력이 생긴다. 한
한 마을에 거울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 거울은 마을을 알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얼굴이 밝고 건강해 보일 때는 거울을 더 열심히 닦았다. 사람들은 그 거울을 보며 안심했고, 거울을 통해 비치는 마을의 모습이 곧 현실이라고 믿었다. 거울은 마을의 자랑이었고, 관리자는 그 자랑을 지키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얼굴에 상처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는 상처를 지우기 위해 거울에 금칠을 했다. 처음엔 번듯해 보였다. 빛이 더 강해진 것처럼 보였고, 사람들도 잠시 안도했다. 하지만 금칠이 두꺼워질수록 거울은 더 이상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사람들은 마을이 좋아진 것이 아니라, 거울이 진실을 비추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렸다. 그 순간 거울은 자랑이 아니라 불신의 대상이 됐다. 아무리 화려해도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는 거울은 더 이상 거울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단지는 교단의 홍보 매체다. 이 사실을 부정할 필요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된다. 공동체의 사역과 방향을 알리는 일은 분명 중요한 역할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홍보라는 이름으로 무엇이든 써야 한다는 요구가 등장하는 순간, 언론은 더 이상 언론이 아니다. 역
설 연휴는 한 해의 시작점에서 공동체의 뿌리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시간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하게 살아가던 가족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나누며 안부를 묻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평소에는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관계의 무게와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명절은 단순한 관습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체의 결을 다시 잇는 시간이다. 가족은 신앙의 첫 공동체다. 믿음은 예배당에서만 형성되지 않는다.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사이에서 나누는 말과 태도, 갈등을 대하는 방식 속에서 신앙은 구체적인 삶의 언어를 갖는다. 설 연휴는 가족 안에서 무뎌졌던 마음을 돌아보고, 미뤄두었던 대화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다. 신앙의 말이 삶의 말로 이어지는 자리도 바로 이때 마련된다. 하지만 명절의 풍경은 모두에게 같은 모습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설 연휴가 가까워질수록 더 깊은 공허를 느끼는 이들도 있다. 홀로 지내는 노인, 외국인 노동자, 가족과의 관계가 끊어진 이웃, 명절 비용조차 부담이 되는 가정에게 설은 기쁨의 절기가 아니라 견뎌야 할 시간이 되기도 한다. 웃음과 만남이 강조될수록, 그 바깥에 있는 이들의 고립감은 더욱 선명해진다. 이런 현실
1934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월드컵은 축구 역사에서 특별한 대회로 남아 있다. 개최국 이탈리아는 첫 우승을 차지하며 강국으로 도약했고, 주세페 메아차라는 전설적인 이름도 이 대회를 통해 각인됐다. 하지만 이 우승은 언제나 하나의 질문을 함께 남긴다. 과연 그 업적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가라는 물음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 아래에 있었다. 월드컵은 스포츠 행사가 아니라 국가 선전의 도구였고, “이탈리아의 우승”은 선택이 아닌 목표가 됐다. 그 과정에서 심판 배정 논란, 거친 플레이에 대한 방조, 상대 팀에 불리한 재경기 일정 등 공정성을 훼손한 정황들이 쌓였다. 결국 이탈리아는 트로피를 들어 올렸지만, 그 우승은 지금까지도 ‘깨끗한 승리’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문제는 결과가 아니라 집착의 방향이다. 무솔리니는 국가의 위신과 자신의 정치적 업적을 위해 과정의 정당성을 희생시켰다. 그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정권의 선전물이 아닌, 역사적 논쟁거리로 남았다. 업적을 남기려 했지만, 방식이 함께 기록되면서 오히려 평가가 분열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과거 독재자의 일화로만 남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숫자, 성과, 외형적 성공에 대한 조급함이 커질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