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요셉을 모르는 새로운 왕이 일어나 이스라엘 민족을 학대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강성하여짐으로 적과 합세해 우리를 물리치고 여기서 나갈 것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장정만 60만 명의 무보수 일꾼은 애굽 왕에게는 큰 유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고통과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이뤄지고 있었으니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았으니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어려운 고역으로 고통을 안겨줬습니다. 하루에 일할 계획표에 의해 철저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과 괴로움을 겪게 됐습니다. 그 후에 또 하나는 산파들을 시켜서 남아면 죽이고 여아면 살리라는 엄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왕이 그그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고 물었으나 산파들이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여인들은 튼튼하여 우리가 가기 전에 미리 잘 낳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도 안 되니까 군인들에게 명령합니다. 여아이면 살리고 남자아이면 죽이라는 엄명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84년 하버드 대학교의 한 교수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슬프기 때문에 웁니까, 아니면 울기 때문에 슬픕니까?” 학생들은 웃었다. 말이 안 되는 질문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당연히 슬프니까 우는 것이지 울어서 슬퍼진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그 교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확신 하나로 이후 100년 이상 심리학의 방향을 바꿔 놓았다. 그 교수의 이름이 ‘윌리엄 제임스’이다. 그런데 사실, 이 질문이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가? 제임스는 이 질문을 강의실에서 꺼내기 전 자신의 삶에서 먼저 이 질문과 처절하게 싸웠다. 그는 20대 내내 극심한 우울증과 무기력에 시달렸다. 의대를 졸업했지만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고 자살 충동을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절망의 바닥에서 제임스는 하나의 결단을 내렸다. 감정이 나를 이끌도록 두지 않겠다. 내가 행동으로 감정을 이끌겠다. 기쁘지 않아도 기쁜 사람처럼 행동하겠다. 의욕이 없어도 의욕 있는 사람처럼 움
거짓 자아의 세계에서 사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또한 우리는 경쟁적인 세상에서 위험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거짓 자아의 세계는 외로운 세계이다. 다른 이들이 결코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해야만 한다. 거짓 자아가 형성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거짓 자아를 증대시키고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것을 보호하는 일이 일생의 과업이 됐다. 두려움이나 위험이나 외로움만 없다면, 부분적으로나마 그 상황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행복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 안정제를 복용하거나 정신과를 찾아간다. 또한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전쟁과 같은 것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두려워 말고 분리시켜라 숨겨진 동기를 직면하지 않는 한 참 자아에서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없고 언제나 필요와 욕구, 곧 거짓 자아를 통해 보고 듣는 모든 것을 걸러낼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와 같은 수련을 통해 방어기제를 서서히 무너뜨려 숨겨진 동기들을 명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불을 켜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실수록 자신을 더 분명히 보
‘순수하다’라는 말은 다른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것을 뜻합니다. 빌립은 눈치도 느리고 특별한 재능도 은사도 없던 사람이었지만, 그는 순수한 믿음을 가진 제자였습니다. 순수한 믿은은 과연 어떤 믿음일까요? 단순한 순종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1:43) 예수님은 빌림을 만나셨을 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나를 따르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이때 놀랍게도 빌립은 예수님을 그냥 따라갑니다. 심지어 성경은 ‘빌립이 예수를 따라갔다’는 결과도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순종으로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자가 됐습니다. 순수한 믿음의 사람은 그대로 믿지만 의심과 걱정이 많은 사람은 쉽게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 쉽게 순종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 명령에 의심하고 주저하기보다 오직 주님을 신뢰함으로 단순한 순종을 하기 바랍니다. 분명한 확신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고 하용조 목사의 ‘초점’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의 길이 우리의 길과 달라
로마서 8장 38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덟 대요?”, “한 가게에서 한 번에 여덟 대를요?” 수화기를 든 사내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그가 30년 동안 길에서 팔아온 물건은 ‘밀크 셰이크’였다. 한 대가 한 번에 다섯 잔을 만들어 내는 기계였다. 여덟 대면 한 자리에서 마흔 잔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캘리포니아의 이름 모를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식당에서 그것을 주문했다는 것이다. 30년을 길에서 보낸 그였지만 이런 주문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는 낡은 세일즈 가방을 들고 모텔과 모텔을 전전하면서 물건을 파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세일즈맨이었다. 그는 뭔가 착오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 40잔을 한 번에 필요로 하는 식당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52세의 떠돌이 영업사원은 그 현장을 자신이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해 야간 비행기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그리고 그 식당에 도착했을 때,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됐다. 그 52세의
성경은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며 또한 하나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성경은 천지창조로 시작해 세상 종말까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하나는 구약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 기록된 것이고 또 하나는 신약으로 예수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사역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기록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알고 믿고 구원받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은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예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시간표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때입니다. 출애굽기에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녀들이 애굽으로 내려와 살게 됐다는 것으로 창세기가 끝나고 이 모든 것이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됐고 형제들을 초대했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앞서 보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
거짓 자아(1) 인간은 외모로만 평가되지 않는다. 외적 모습과 겉으로 보이는 성격 자체가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내면의 아픔을 숨긴 채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며 살아가기도 한다. 인간의 자아는 태아 때부터 시작해 주로 유년기 때 형성된다. 태아 때부터 보호자와 어떤 관계를 형성하였고 유년기 때 보호자와 어떤 유대감을 형성하였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정체성은 달라진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한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를 밝혀주며 한 인간의 인생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지만 주체적이지 못한 나머지 타인의 삶을 의식하여 시시때때로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볼 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자기 자신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은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과 확연히 구분된다. 인생의 어려움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지만, 삶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마음속에 올바르게 형성되지 못한 자아로 인해 삶의 방향을 어느 곳으로 향하여야 할지를 찾지 못한 채 절망의 세계로 빠져든다. 정체성 왜 중요한가? 엄마와 아이의 관계는 불가사의하다. 엄마가 없는 아이는 구멍이 뚫린 독처럼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욕심 많은 사람에게 ‘놀부 같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영어권에서는 의심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도마와 같은 사람’(Doubting Thomas)이라고 합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제목은 ‘의심했던 제자 도마’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도마는 더 이상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의심이 변할 수 있었을까요? 의심이 찾아올 때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 20:24) 도마가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자 자신도 함께 죽음으로 주님의 부활을 경험하는 자가 되겠다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의심이 많은 도마가 됐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구멍 난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며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려주셨을 때 그 자리에 도마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니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이 닫혀 있을 때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
기독교 신앙을 역설의 종교, 역설의 진리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상식과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해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버리는 것이 얻는 것이며 죽는 것이 곧 살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가장 큰 역설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한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이시지만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나귀를 타신 왕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마 21:11)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나귀를 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스가랴서 9장 9절 말씀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나귀를 탄 왕의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볼품없어 보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섬기러 오신 왕, 낮아지고 겸손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구속의 역사를 이루는 왕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귀를 타신 예수님을 보며 회개하고 주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진노하는 왕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믿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4장 46~54절은 가버나움에 사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가나에서 말씀으로 치유한 표적을 다룹니다. 사마리아에서 갈릴리에 가셨고 가나에서 요한복음 7가지 표적 가운데 두 번째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고향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큰 배척과 영적 무관심이 팽배했던 곳입니다. 주님은 이 불신의 땅 갈릴리에서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준 왕의 신하를 만납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혹시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을 바랐으나 주님의 엄한 책망에 불신을 깨고 말씀 하나만 붙들고 일어납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약 32km(80리)를 단숨에 달려옵니다. 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자기 아들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자마자 체면 불구하고 자기 집으로 모시어 아들의 병을 고쳐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왕의 신하는 주님의 능력이 필요하여 주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가리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요 4:48)고 책망하셨습니다. 그의 믿음은 바른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기복신앙에 지나지 않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