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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C. 펜윅(Malcolm C. Fenwick)의 북방선교-3

안희열 교수
침신대 신학과
(선교학)

북한 동아 기독교의 교회분포도(1899-1949)


4) 함경도와 평안도에서의 교회개척
 “북한 동아기독교의 교회 분포도(1889~1949)”에서 보듯이 함경도 교회개척이 북한 동아기독교회 중에서 75%를 차지해 가장 높다. 함경북도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눠지며, 경흥구역과 회령구역에 각각 15개 교회가 개척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 지역에 10개 정도가 더 있었다.


함경남도에는 약 5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삼수구역 내에 삼수영성교회가 있었고, 갑산에도 교회가 있었다. 지금까지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 통계에는 평안도가 빠져있었다. 이곳에는 최소 6개의 교회가 있었는데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 중 약 10%를 차지한다. 이곳에서 교회개척이 약했던 것은 선교지 분할 정책에 따라 미국북장로교가 담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아기독교는 초창기부터 평안도 전도에 힘썼고, 1913년에는 7명의 전도자를 평안도의 자성(慈城)과 후창(厚昌)으로 파송해 방사현 등 많은 신자를 얻기도 했다. 방사현은 이후 목사가 되어 1947년 자성구역 부흥동교회에서 목회했는데 이 구역에 여러 교회가 생겨났고, 후창구역 역시 여러 개의 교회가 개척됐다. 한편 동아기독교는 1933년에 평안북도 초산(楚山)구역을 개척하려고 이종만, 이창백, 임윤창, 권병선, 이학이, 이덕상을 파송해 북방선교에 힘썼다.


5) 평가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의 북방선교를 평가하면 첫째로 교회개척은 원산총부에서 파송된 목사보다는 평신도(통장, 총장, 반장 등)들이 중심이 됐다. 이런 점에서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는 평신도가 사역하는 신약교회의 정신을 지녔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 교세는 함경도, 원산, 평안도 순이었다. 함경도가 75%의 교세를 차지해 북방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잘 감당한 것을 볼 수 있다. 셋째로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는 대다수가 ‘집’에서 예배드리는 가정교회 스타일로 교회개척이 이뤄졌기 때문에 오늘날 ‘조직교회’와는 사뭇 다르다.


따라서 교회개척은 쉽고 빨리 이뤄졌지만 교회등기가 되어있지 않다보니 2019년 ‘펜윅 한국선교 130주년’을 맞이한 해에 당시 북한 동아기독교회의 주소조차 발견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넷째로 평안남도 평양과 황해도 소래와 같은 대도시에 교회개척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동아기독교가 선교지 분할 정책의 피해자였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해방 후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 소멸
동아기독교의 북한교회는 해방 이후 1947년, 1948년에 교단재건을 위한 1차, 2차 모임을 갖고 조직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조선노동당 중앙의 방침에 따라 총회가 해체되어 교단은 소멸됐다. 당시 대다수의 교단 지도자들은 월남했지만 김영관 목사와 김일제 목사만이 남아 교단 재건을 위해 힘썼다.


특히 김영관 목사는 북한 동아기독교의 ‘북방선교 대가’라 불리워질만하다. 그는 제4대(1934~1939년) 감목을 역임했고, 감목 당시 ‘반(反)신사참배 달편지’로 옥고를 치를 만큼 강직하며 행동하는 신앙인이었다. 그에게 북방선교의 ‘3C’ 전략이 있었는지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이다.


그는 ‘죽으면 죽으리라’의 신앙으로 일제의 신사참배를 교단적으로 거부한 복음에 헌신(commitment)한 자였고, 북한과 왕청을 오가며 순회전도(circuit evangelism)에 모범을 보였고, 1924년에는 시와재교회를 개척할 만큼 교회개척(church planting)에도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는 끝까지 북한에 남았다가 고향에서 1991년 96세에 주님의 품으로 갔다.


김영관 목사(왼쪽)와 전치규 목사(오른쪽) 김영관 목사는 ‘반(反) 신사참배 달편지’를 동아기독교 전체교회에 발송함으로 옥고를 치렀다.


III. 동아기독교의 만주 교회개척과 북방선교
동아기독교의 최대 선교전략지는 만주였다. 펜윅이 1906년 교단을 창설하자마자 함경도와 간도를 전략 요충지로 삼고 5명의 전도자들을 파송해 만주선교에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간도란 원래 두만강 북쪽을 말하던 것인데 이후 압록강 북쪽을 서간도라 부르면서 두만강 북쪽을 북간도라 불러 구분하였다.


펜윅이 처음에는 두만강 북쪽의 간도에 전도자들을 파송했지만 점차 훈춘, 왕청, 목단강 등까지 확장하면서 동아기독교의 선교는 만주 전체로 확대됐다. 만주란 중국의 동북부 지역, 즉 동북삼성(東北三省)이라 불리는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지역을 말하는데 동아기독교는 바로 이곳을 6개 구역으로 나누어 만주선교에 큰 성과를 거뒀다.


1. 교세
동아기독교의 만주선교는 1906년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1940년대에는 100개 교회로 성장했다. 현재까지 이곳에 동아기독교가 세운 교회 가운데 이름이 밝혀진 교회는 총 55개이고, 신자 수는 약 3800명에 이른다. 즉 1개 교회당 평균 70명이 모일 만큼 당시 재만 동아기독교는 튼튼한 교세를 지녔다.


이처럼 재만 동아기독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로는 펜윅이 교회개척이 잘 되는 지역을 빨리 간파하고 사람을 파송했기 때문이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는 교회가 성장하는 지역으로 이주가 잦은 곳을 지적했다. 타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불안하여서 복음의 수용성이 높기 때문이다. 재만 한인 인구가 1910년에는 10만 명을 조금 넘었다가 30년이 지난 1945년에는 2백만 명을 훌쩍 넘어설 정도로 이곳은 선교의 황금밭이었다. 펜윅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2. 디아스포라 선교를 위한 동아기독교의 만주 교회개척
재만 동아기독교는 두 그룹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첫째는 만주로 이주 온 사람들, 즉 디아스포라(조선족)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였고, 둘째는 중국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이었다. 놀라운 것은 재만 디아스포라를 대상으로 한 동아기독교의 선교 비율이 90%로 상당히 높았다는 점이다. 당시 재만 동아기독교 통계를 보면 재만 디아스포라 교회가 100개, 중국인 교회가 7개에서 10개 정도로 디아스포라 선교의 비율이 높았다.


디아스포라 선교는 1세대(베드로형)와 2세대(바울형)의 역할이 각각 다른데 재만 동아기독교는 초기 이민자들로 형성된 때라 2세대보다는 1세대의 역할이 컸다. 1세대는 헌신적이며, 희생적이지만 현지 언어에 약하고, 현지 문화(음식, 옷, 주택, 세계관 등)와 충돌이 심하다. 베드로의 경우가 그렇다. 반면에 2세대는 1세대보다는 복음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 좀 떨어지지만 현지 언어에 능숙하고, 현지 문화와 충돌이 거의 없다. 소명만 분명하다면 훌륭한 영적 자원이 될 수 있는데 바울 같은 경우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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