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이해(understand)하고 해석(interpretation)하기 위해서는 그 성경이 쓰여진 땅, 역사, 그리고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고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지 답사를 하다 보면 그 중요성에 비하여 의외로 많은 분들이 이것에 무관심하다는 현실에 놀라곤 한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빌립과 나다나엘을 제자로 부르시는 과정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담고 전개된다. 우리는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과정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문맥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는 일을 간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다나엘이 왜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는 사실에 발끈하고 그를 폄하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했는지, 그리고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예수님의 무화과나무 말씀에 나다나엘의 태도가 급변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이 이스라엘 땅에서 그 문화적 배경 안에서 쓰인 것이니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그래서 성경의 지리, 역사,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절실해지는 까닭이다.
먼저 이러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사렛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예수님에 대한 나다나엘의 폄하 발언(“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절)의 배경은 그 당시 갈릴리 지방 또는 갈릴리 지방에 속해있는 나사렛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적 통념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당대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을 찾아가면 종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아주 오래된 사회적 통념인 것이다.
우리는 그 실마리를 이사야서 9장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된다. “1.전에 고통 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비취소다”(사9:1~2)
갈릴리 지방 그리고 그 지방에 속해있는 나사렛에 대한 멸시 풍조는 구약성경 시대에 이미 형성되어진 것이다. 그 원인을 스블론과 납달리 땅의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스블론과 납달리 땅은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 지역을 갈릴리 지방이라고 말한다. 갈릴리지방은 고대로부터 북쪽 오리엔트 문화권(바벨론, 앗시리아, 바사)과 남쪽 이집트 문화권을 연결하는 비아-마리스(고대도로)가 통과하는 지역이다. 그래서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교류가 이 길을 통하여 수천 년 동안 이뤄졌다.
그 결과 갈릴리 지방은 고대로부터 전쟁이나 교류를 통해서 이방 문화를 항상 접하게 되고 또한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이방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이 세워진 예루살렘에 거했다. 높은 산악지역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은 그만큼 보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예루살렘에 사는 종교지도자들의 관점에서 북쪽 갈릴리 지방 사람들은 이방 문화에 오염된 경건치 못한 사람들로 생각되었을 것이 자명한 일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째 문제는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 내용에 있다(요1:47~51). 대화를 살펴볼수록 알쏭달쏭한 말로 전개된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봤다는 이유로 그가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단정하시더니, 이 말씀에 예수님에 대해서 폄하 발언을 서슴지 않던 나다나엘은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요, 메시아로 화답하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무화과나무에 어떤 비밀이 있기에 이런 대화가 오갈 수 있었단 말인가?
이 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과 전통적 관습을 알아야만 한다. 이스라엘 문화권에서 무화과나무는 다음과 같은 특별한 상징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첫째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또는 평화를 상징했다. 오늘날 성지에 가면 무화과나무가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성경시대 무화과나무는 아주 중요한 농산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화과나무를 좋아한다.
왜냐하면 많은 열매를 맺으며 약으로도 사용될 뿐만 아니라(왕하20:7), 뜨거운 나라에서 그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평화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졌다(왕하18:31, 왕상4:25).
둘째로 무화과는 율법을 상징했다. 무화과나무 열매는 매우 단맛을 내며 버리는 것이 없이 모두를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화과 열매를 하나님의 토라 즉 율법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버릴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꿀 송이처럼 달기 때문이다(아담 너는 누구인가, 이병열 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
셋째로 무화과의 언어적 의미에 단서가 있다. 무화과나무를 의미하는 히브리 언어는 테에나(Taeanah)이다. 히브리어는 항상 동사에서 그 뜻을 취하여 명사를 만드는데 무화과나무를 의미하는 동사는 ‘아나(anah)’로서 ‘그리워하다’, ‘애도하다’, ‘만나기를 바라다’, ‘찾다’, ‘구하다’, ‘무엇인가 얻으려고 애쓰다’, ‘기쁜 일을 찾아 헤매다’,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깊이 명상하고 탐구하며 기도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이사항 대화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마음에 간사함이 없이 하나님의 뜻과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명상하고 탐구하며 기도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에 근거하는 나다나엘의 진실된 신앙을 보셨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육체의 필요를 구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몰려들었던 수많은 무리들과 나다나엘은 달랐던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그 땅의 문화, 지리, 역사적 용기 안에 담겨져 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그 교훈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배경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성지순례보다는 성지답사를 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상목 목사
성경현장연구소 소장
신광교회 협동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