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강단의 침입자

 

 

지난 달 말 미국 센트럴플로리다대(UCF) 서비스경영학과의 정모 조교수가 수업 중 너희들 다 죽어가는 표정인데, 내가 지금 무차별 살인(killing spree)이라도 저지르는 거야, 뭐야?”라는 발언을 했다가 한 학생의 고발로 학교 당국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이에 대해 정교수는 당연히 농담이었다. 학생들도 함께 웃었다라고 징계의 부당함을 주장했지만 징계는 철회되지 않았다.

 

최근 수원의 한 교회 목사가 설교 중에 부적절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인권위원회의 징계를 받고 법원으로부터는 그 징계 조치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목사는 설교 중 하와가 사과 2개를 몰래 따서 삼켰는데 씨앗은 소화가 안 돼 뱃속에서 점점 올라와 이것이 가슴이 됐다여자의 치마와 설교는 짧을수록 좋다고 했다.

 

이에 성적 굴욕감을 느낀 성도가 인권위에 진정을 했고, 인권위는 목사의 언행이 성희롱이라고 판단했고, 해당 목사는 성희롱 의도가 없었고, 혐오감을 느낄만한 언동이 아니었다며 인권위의 징계조치를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했지만 법원은 언동이 성경과 전혀 무관한 내용으로 여성의 노출과 신체를 비하하는 내용이었던 점 등에 비춰 이로 인해 신도들이 성적 굴욕감을 느꼈다고 보인다는 판결로 인권위의 조치를 정당화시켰다.

 

인권위의 징계조치나 법원의 판결은 적어도 이 한 사건만 놓고 보면 정당하다. 목사의 설교는 폭언이 되어서도 수치감을 주어서도 안 된다. 해당 목사는 성희롱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며 왜 한 부분만 가지고 문제를 삼느냐고 항변할지 모르지만 아무리 한 부분이라도 언급된 대로 설교를 했다면 그것은 이미 설교의 범주를 벗어난 것으로 모욕감을 주기에 충분한 언어폭력이다.

 

또한 성경을 아무리 재미있게 말하거나 이해를 돕기 위해 말했다 할지라도 성경이 아닌 것을 설교라는 이름으로 해서도 안 된다. 설교자는 단어 하나, 문장 구성 등 모든 것에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성경에 대한 설교자의 해석을 전하는 것 보다 계시인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한다. 물론 성경에 대한 해석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 해석 자체도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의 언어도 성경적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 M. 바운즈가 설교자의 능력은 기도에 있다라는 글에서 설교의 가장 큰 장애의 요인은 설교자 자신이라고 한 것처럼, 설교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을 통해 은혜를 끼치는 자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은혜의 장애물이 될 수도 있음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아무리 청중 중심으로 변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강단이라 할지라도 선택된 용어와 표현은 신중해야 한다. 그래서 청중에게 설교하기보다는 항상 설교자 자신에게 하는 설교여야 한다. 지금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다. 철저한 자기중심 시대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더욱 성경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설교자들의 문제만큼이나 큰 문제가 마치 어둠처럼 서서히 교회와 강단으로 스며들고 있다. 아라비아 우화집에 나오는 낙타의 발처럼 조금씩 교회 안과 강단 위로 정복의 욕구를 드러내며 진격해 오고 있다. 이는 시대적 사조려니 하고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생각하며 적당히 타협하거나 묵인하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정신을 차라고 경계하며 필요하다면 저항을 하여서라도 지켜내야 할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설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고, 교회의 상징이며 목회의 대표적 사역이기도 하다. 강단 위에서 선포되는 설교는 신성한 것으로 그 누구도 항거할 수 없는 거룩한 말씀이다. 그러기에 그 어느 힘도 그 앞에 작용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말씀의 주되신 하나님과 그 말씀의 권위만이 충만해야 한다. 특히 정교분리처럼 어떤 권력도, 어떤 사법적 권한도 개입할 수 있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증거해야 하며, 청중인 성도는 목사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설교는 오직 성령의 개입과 간섭만이 있어야 한다.

 

그동안 수많은 권력이 설교를 감시하고 방해하곤 했지만 강단의 설교는 흔들림 없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십자가 지듯이 피흘리며 지켜 왔다. 그러나 지금 강단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슐라이어마허를 통해 주어진 신학의 위기처럼 지금 강단은 세상의 기준과 가치에 의해 판단 받게 되는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일부에서는 설교라도 세상의 가치를 벗어나면 안 된다고 반론하겠지만 설교는 고유한 권위와 영역이 있다. 설교는 세상의 진리를 전하거나 세상의 가치를 변호 내지 사수하자고 전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설교가 인권위나 사법의 판단을 받는 다는 것은 설교와 설교자로서 대단한 모욕이며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이전과 다르게 변한 성도들의 의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교가 들어야 할 말씀이 아닌 감시되고 평가되어야 할 말씀으로 전락하는 것은 강단의 위기이자 부끄러움이다. 설교는 항상 바르고 정확한 표현으로 철저히 성경적이어야 하지만 혹 그 함량에 있어 조금 미달한다 하여도 사탄이 던진 달콤한 단어 인권이란 이름으로 조명되어져 판단되어져서는 안 된다.

 

청중이 자기 세계관과 세상의 가치로 설교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가 청중 자신을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청중이 자기의 세계관으로 설교를 해석하고 그것에 대한 제재를 인권위나 사법부 등에 호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고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이는 서로가 함께 불행해 지는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설교는 존중되어져야 한다.

 

아무리 인권이 귀한 시대가 되었다하여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어져야 하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렇다고 교회가 인권을 존중하지 않거나 소홀히 해도 된다는 것은 단연코 아니다. 당연히 교회는 성경의 본질이고 설교의 청중인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증거하고, 그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용어를 인권적 용어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한지는 조금 더 고민해 보아야 한다. 예를 든다면 최근 성경과 설교의 용어를 현대적이며 인권적 용어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하면서 개정을 주장하는데 문둥병을 한센병, 염병을 장티푸스로, 그리고 바보는 지적장애자로 호칭하는 것이 옳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표현이 시대적으로 옳을 수 있지만 바보를 지적장애자로 부르는 것이 과연 인권적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바보는 꼭 질병이나 장애와 관계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보라는 표현이 인권적으로 문제가 있으니 지적장애자로 부르라면 과연 그것이 진정으로 옳은 것인가?

 

현실이 모두 진리가 될 수 없듯이, 사실이라고 하여 모두 옳은 것이 아니듯이, 맞는다 하여 모두 적절한 것은 아니다.

 

상대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도 설교자의 중요한 덕목이다. 어찌되었든, 설교에 세상적인 가치를 따라 인권위와 사법이 개입하기 시작한 것은 앞으로 서로에게 불편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불행한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설교 본연의 목적에 충실함으로 스스로 강단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스스로 오염된 세속적 용어와 코미디 또는 개그화 된 재미 위주로 강단의 위기를 자초하지 말아야 한다. 강단은 목사, 즉 설교자의 고유한 영역이고 자존심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스스로 거룩해야 한다. 세상은 이미 강단을 향한 공격 명령을 받았다. 그것을 방어할 수 있는 사람, 방어해야만 하는 사람은 성도가 아닌 오직 목사, 즉 설교자뿐이다.

 

계인철 목사 / 광천중앙교회



배너

총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