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공무도하가’, 더는 부르지 않고 싶다

계인철 목사
광천중앙교회

미국 대선 레이스가 한창 진행 중이다. 공화당 트럼프는 재선을 위한 SNS 정치를 계속하고 있고, 민주당은 트럼프와 맞서 승리할 후보를 고르는 중에 있다. 현재까지는 버그 샌더스와 부통령을 지낸 조바이든, 동성애자 부티지지 등이 접전을 벌이고 있다. 그 외의 다른 후보들이 열심히 뛰고 있지만 아마도 이들 중 한 후보가 대선전에서 트럼프와 치열한 혈투를 벌일 것으로 예상한다.


그런데 트럼프와 상대할 후보군에서는 멀어져 있지만 유권자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는 한 후보가 있다. 그는 0%의 지지율에서 최근 8%까지 끌어 올리는 놀라움을 주고 있는 대만계인 앤드류 양 갱(Yang Gang)이다. 그는 현재 민주당 대선 후보 4위에 올라 있고 그의 지지층 표가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어느 날 혜성같이 나타난 그가 이렇게 주목받는 이유는 그의 정치적 기반 또는 배경 때문이 아닌 그의 선거운동 방식 때문이다.


그의 선거운동 방식을 연구한 언론은 첫째, ‘좌도 우도 아닌 새로운 지지층’ 둘째, ‘해시(#)태그와 인터넷 신조어로 무장’ 셋째, ‘숫자(math)로 설득’ 넷째, ‘즐기면서 선거 운동’ 등 네 가지로 정리했다. 그는 분명 진보진영의 후보였지만 그를 지지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보수층의 사람들로 꽤나 많이 있었다. 지금까지 다른 진보후보에게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신선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의 선거운동 방식 중 첫째 방식인 ‘좌도 우도 아닌 앞으로’(Not Left, Not Right, Forward)였다. 이것을 대하면서 마음 한편에 강한 이미지의 두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모세의 죽음 이후, 가나안 정복을 위해 요단강 도하를 앞두고 있었던 여호수아이고 또 한 사람은 유다의 왕 요시야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1:7)는 명령을 받았고, 요시야는 여호와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왕하22:2) 한 사람은 믿음의 순종이었고, 또 한 사람은 믿음의 정직이었다.


주님이 오늘 교회와 목회자 성도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리 크거나 대단한 것이 사실상 아니다. 신앙 안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과 왕들은 좌우로 치우치며 하나님을 떠났다. 그러기에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앞만 바라보고 앞으로만 나아가기란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출발과 달리 과정이나 결과는 다른 곳을 헤매다 결국 엉뚱한 곳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다.


안타깝지만 오늘날 교회들과 교단들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자주 좌우로 치우치는 교회들과 교단들이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걸음이 느린 거북에게 초점을 맞추고 경주를 시작한 토끼와는 달리 오직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목표만을 바라보고 느린 걸음이지만 열심히 앞을 향해 걸었던 거북은 토끼를 이겼다. 결과와 다른 상상이지만 거북은 비록 토끼에게 패하였더라도 낙심하거나 불행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목표를 바라보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오직 목표에 최선을 다하여 결국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교회들과 교단들은 토끼같이 잘못된 목표와 대상을 상대로 세월을 비롯하여 많은 것을 낭비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이제는 오직 앞만 보고 앞으로만 달려가는 교회와 교단이었으면 하는 소망이 더욱 간절하다. 더 이상 본질이 아닌 비본질에 미혹당해 시간도 에너지도 낭비하지 않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명들을 감당하는 전진만이 있었으면 한다.


오래 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어져 상영되었던 ‘임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영화의 제목, 즉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다시는 부르지 않았으면 한다. ‘공무도하가’는 ‘공후인(箜篌引)’이라 불리는 한국 최고(最古)의 시로 ‘곽리자고((藿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어 불렀던 4구4언의 한역시로 진나라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실렸던 것을 조선 후기 한치윤의 ‘해동역사’ 등에 수록됨으로 알려진 고대가요다.


어떤 사연 때문인지 모르지만 술병을 들고 술에 취한 채 물을 건너려는 남편을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가 만류했지만 이내 그 말을 듣지 않고 물을 건너다 결국 물살에 휩쓸려 죽고 말았다. 이를 슬퍼하던 광부의 아내가 공후를 연주하며 ‘공무도하’를 지어 부르며 슬프게 울었는데, 이것을 들었던 자고(子高)가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본대로 이야기하며 들은 대로 공무도하가를 불러주자 여옥이 슬픈 눈물을 흘리더니 이내 공후를 잡고 연주하며 노래했다.


그동안 한국교회와 각 교단들은 거의 마지노선과 같은 선 또는 강을 건너지 말아 주기를 주님과 세상 많은 사람들로부터 간절한 호소를 들었음에도 결국 그 선 또는 강을 건너지 않았나 싶다. 복음 안에 있어야 할 교회들과 교단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지상명령 안에 머물며 그 사명을 감당해야 했는데, 간절한 외침, 부르짖음에도 술 취한 광부(狂夫)같이 건너서는 안 되는 강을 건너 주님을 슬프게 하고 세상에 실망을 주던 지난 시간들이 아니었다 싶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단과 교회들은 어떠했는가? 필자의 결론은 중요하지 않다. 각자의 입장에서 평가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생론적 오류는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교단은 교단의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도 교단도 복음을 근거로 하여 감당해야 할 주님의 일들이 산재해 있다. 교회도 교단도 쓰임 받는 것은 목회자들이다.


어떤 일에 취해 건너서는 안 되는 강을 건넜거나 건너고 있다면 뒤에서 간절함으로 호소하며 돌아오라고, 가지 말라고 외치는 절규 같은 소리, 성령의 소리에 순종하여 돌아서야 한다. 부르는 소리가 들릴 때, 안타까움으로 외치는 소리가 있을 때가 기회다. 계속가면 광부처럼 물살에 휩쓸려 죽게 될 것이고 결국 안타까운 슬픔의 통곡만이 남을 것이다.


고대 가요는 고대가요로 남겨 놓았으면 좋겠다. 다시 부르는 ‘공무도하가’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교회의 목회자들, 교단의 총회장 이하 임원들에게 건너서는 안 되는 강을 건너는 ‘공무도하가’를 다시는 부르지 말자고 간절함으로 제안한다.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공도무하)
‘임은 그예 물을 건너고 말았네’(公竟渡河, 공경도하)
‘물에 휩쓸려 돌아가시니’(墮河而死, 타하이사)
‘임이시여 이를 어이할꼬’(當奈公何, 당내공하)


스턴트맨 무술 감독인 정두홍이 얼굴도 안 나오는데 뭐 그리 열심히 하느냐는 질문에 ‘뒷모습에도 감정이 있다’(‘행복미소’ 이병준)고 했던 말처럼 나중에 우리의 뒷모습은 좋은 감정 또는 나쁜 감정을 보이게 될 것이며 그것은 곧 어떤 모습으로든 역사가 될 것이다.



총회

더보기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여 3500침례교회와 목회 동역자. 성도들 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죄인으로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이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이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직접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이제는 구원의 완성으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몸소 가르치시고 보여주시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주신 사실을 믿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가르치셨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 고난 받는 자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회복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믿음의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 공동체의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놀라운 소식입니다. 이 소식이 복음의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