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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서 구원론 : 하나님의 나라(천국-2)

신약성서 신학산책

김광수 특임교수
침신대 신학과

필자는 지난 호에서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해 한국의 일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중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미래적이며 장소적인 관점과 그것을 토대로 이뤄진 천당 신앙과 기복 신앙에 관해 말했다. 그리고 그런 관점과 신앙이 예수님의 말씀들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본질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많은 제약과 한계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 주제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역동성과 현재성에 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언급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본질과 목적에 관해 그것의 역동성과 현재성과 진행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관하여 공관복음서들에서 사용된 용어들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용어들은 두 가지 곧 “하나님의 나라”와 ‘천국’이다. 천국은 직역하면 “하늘들의 나라”이며 이것을 한자어로 바꾼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천국’이다. 마가는 예외 없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용했다. 누가는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를 사용했으며 그밖에 다른 수식어를 사용해 “당신(하나님)의 나라”(11:2), “그(하나님)의 나라”(12:31), “그 나라”(12:32; 22:29), “내(예수) 나라”(22:30), 그리고 “당신(예수)의 나라”(23:42)를 사용했다.


마태는 특이하게 ‘천국’(“하늘들의 나라”)을 주로 사용했다. 그런데 마태도 “하나님의 나라”를 네 번 사용했다(12:28; 19:24; 21:31; 21:43). 마태는 수식어 없이 관사만을 사용해 “그 나라”를 여러 번 사용했으며(4:23; 6:13; 8:12; 9:35; 13:19; 13:38; 24:14; 25:34), 그밖에 “당신(하나님)의 나라”(6:10; 20:21), “그(하나님)의 나라”(6:33), “그(인자)의 나라”(13:41; 16:28), “그들(의인들)의 아버지의 나라”(13:43), 그리고 “내(예수) 아버지의 나라”(26:29)를 사용했다.


마태가 사용한 어구인 ‘천국’(하늘들의 나라)에서 ‘하늘’은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여러 대용어들 중 하나로서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통치 영역과 그의 주권을 가리키는 유대인들의 표현 방식이었다. 당시 유대인들과 유대계 기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나 거룩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 분의 이름을 직접 부르거나 사용하기를 꺼려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대용어들을 사용하기를 즐겨했다.


공관복음서들에 사용된 대용어들 중에 다음과 같은 익숙한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주’(막12:11, 29, 30,36; 마 21:42; 22:37, 43; 눅4:18; 10:27), “권능자의 우편”(막14:62),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막14:61), “권능의 우편”(마26:64), 그리고 ‘하늘’(막11:30). “하나님의 나라”와 “하늘들의 나라”(천국)는 용어(하나님, 하늘) 자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의미를 가진 어구들이라는 것이 대체적으로 수용되는 견해다.


마가와 누가는 대부분 “하나님의 나라”를 사용한 반면, 마태는 대부분 ‘천국’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공생애의 예수님은 둘 중에 어떤 어구를 사용했는지 분명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를 위해 선행 연구 곧 이 주제에 관해 그동안 학자들이 어떤 점을 주목해 이해하려고 했는지에 대하여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 주제는 신약성경신학의 중심 주제이기 때문에, 그동안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그래서 여기서는 간략하게 학자들의 연구를 개괄하며 이 주제의 본질적인 이해를 위하여 어떤 점에 주목해야 하는지에 관해 살펴본다. 19세기 후반까지 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주로 사랑의 계명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교훈으로 이해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에 일부 학자들이 예수님의 교훈 속에 담긴 하나님의 나라-천국은 본질적으로 “묵시적 개념”이라는 것 곧 하나님께서 그가 정하신 때에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그를 대적해 세워진 모든 것들을 파괴하며 해체하며 새롭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심판하시는 주권적 권능의 행동”으로 이해하게 됐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행동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것을 촉진시키거나 영향을 줄 수 없으며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주권 속에서 세상에 오시도록 기도하라는 교훈을 받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오게 하는 일에 기도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도래는 매우 임박해 있으며 너무 임박하여 이미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본격적인 도래는 아직 앞에 일어날 미래적 사건이 될 것이며 그래서 예수님의 윤리적 교훈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할 것에 대한 임박한 희망의 맥락에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의 윤리 혹은 중간 윤리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한 이러한 묵시적 이해는 그것이 단순한 관념이나 지식이나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심판하시는 주권적 행동”이라는 본질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천국이 매우 임박해 있긴 하지만, 아직 현실의 실재가 아닌 여전히 미래적인 것으로 이해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 시간적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20세기 중반까지 활동했던 영국의 신약성서학자 ‘다드’(C. H. Dodd)였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간적 요소를 규명하는 연구에 집중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들에 있는 동사의 시제를 연구하고 그것에 기초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와있는 것이며 이미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공생애 사역 속에서 실제로 왔다는 것 곧 예수님은 예언자들이 미래에 있을 것으로 예언했던 종말론적 구원의 역사가 그의 사역을 통해 현실의 실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선포했다고 이해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들에 사용된 동사들의 시제가 많은 경우에 “완료 시제”와 “현재 시제”와 “과거 시제”로 된 것에 주목했다. 이 시제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시간은 바로 ‘지금’ 곧 ‘현재’라는 것이다.
마가에 따르면, 예수님의 첫 번째 선포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라는 것인데, 이 선포에서 ‘찼다’와 ‘가까웠다’는 동사들이 완료 시제로 되어 있다. 헬라어 완료 시제는 과거에 일어난 행위가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으며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행동을 가리킨다. 그래서 이 첫 번째 선포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결정적으로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계획하셨던 구원의 때가 다 찼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와서 시작됐다는 선포라는 것이다.


다드는 또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들과 예수님의 구체적인 활동에 관한 말씀들이 현재 시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현재적 구원 행동으로 선포하셨다고 이해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메시아에 관한 침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변하셨다: “못 보는 자가 보며, 못 걷는 자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하라”(마11:4~6; 눅7:22). 누가복음에서 70인의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현재 체험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3~24; 마13:16~17).


다드는 또 예수님의 비유 연구에 집중했는데, 그는 그 비유들을 하나님의 나라 이해와 연결시켰다. 그 비유들의 교훈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말하려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백성의 삶의 현장에 이미 도래하여 행동하는 종말론적 위기의 형태로 예수님의 사역 속에서 현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땅에 숨겨진 보화(마13:44)와 값진 진주(마13:44~46)의 비유는 가장 좋은 보화를 얻을 기회가 지금 앞에 있다는 것이며 망대를 건축하는 자와 전쟁에 나가는 왕의 계산(눅14:28~33)도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위기 상황 속에서 그 나라를 체험하고 실현하기 위해 믿음으로 모험-결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선포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와있다는 것이 명백하고 분명하다는 것과 그래서 종말의 틀을 미래에서 현재로, 기대에서 실현과 체험의 영역으로 옮겨와야 한다고 제시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는 미래적 환상의 대상이 아니라 현재적 체험의 대상 곧 지금 보고 듣고 만나는 체험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다드의 발견은 하나님의 나라-천국의 이해에서 결정적인 틀의 전환을 제공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미래적 희망의 대상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보고 듣고 체험하고 실현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다드 이후의 학자들은 미래 시제로 표현된 하나님의 나라 말씀들과 다드의 견해를 결합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의 완성과 완결은 아직 아니다”라는 소위 “이미, 아직 아니”(already, not yet)의 공식어로 표현하게 됐다.
필자도 이 공식어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천국을 이미 시작되어 진행되고 있으나 그것의 완성과 완결은 아직 아니다”라는 틀에 따라 제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