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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이 우리 손에 오기까지(4)

조선의 “새빛” 선교사들 (6)

선교사 직분을 사임한 토마스는 중국을 떠나 영국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그러나 당시 여러 상황으로 인해 귀국은 쉽지 않는 상황이었고, 그는 생계를 위해 산둥성에 소재한 항구도시 ‘즈푸’의 세관에서 통역사로 취직했다. 지도를 보면, 항구도시 즈푸의 우측 방향에는 서해(황해)가 있는데, 서해(황해)를 넘으면 바로 조선이었다. 세관에서 일하게 된 토마스는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일에 전념했다. 약 9개월 정도 일하게 됐는데, 이때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알렉산더 윌리엄스 선교사를 만나 호형호제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토마스는 윌리엄스 선교사를 통해 조선인들과 만나는 기회가 생겼다. 그 조선인들은 김자평과 최선일이라는 천주교 신자였다.

김자평과 최선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조선은 1791년 신해박해(천주교 신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1790년 북경교구에서 내린 ‘제사 금지령’에 따라 조상 숭배를 거부하고 신주를 모두 불태우며, 윤지충의 어머니 장례를 전통적인 유교 방식으로 치르지 않아 처형당한 사건)를 시작으로 이후 천주교에 대한 크고 작은 여러 탄압과 박해가 많았다.

 

왜냐하면 조선은 천주교를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에 반대하는 사학(邪學-간사한 학문)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때 토마스는 동북아시아의 작은 나라 조선에 대해 처음 알게 됐고,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당한 수난을 듣게 됐다. 토마스의 마음은 다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불이 붙어 뜨거워졌다. 이후 토마스는 조선 선교를 위해 선교사 복귀를 하고 싶다고, 런던선교회에 요청했지만 거절됐다.

 

왜냐하면 런던선교회의 입장에서 토마스는 아직 선교사로서 자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으며, 더구나 조선은 천주교 박해로 인해 안전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런던선교회의 선교사 복직을 거절당한 토마스는 자체적으로 조선 선교사역을 준비했다. 김자평과 최선일로부터 조선어를 배우게 됐고, 이후 윌리엄스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윌리엄스가 소속된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대리인 자격으로 한문성경과 경비를 지원받아, 결국 1865년 9월 조선으로 향하게 됐다.

 

이윽고 황해남도 해안에 도착한 그는 약 2개월 반 동안 백령도를 비롯해 연평도까지의 인근 섬들을 돌면서, 한문성경을 나눠 주면서 복음을 전했다. 원래 토마스 선교사는 황해남도 해안을 돌고 거기서 한양까지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흔히들 그가 탄 배가 난파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그의 선교활동이 적발되어 조선에서 추방당한 것이다. 그는 추방당해 결국 북경으로 오게 됐다. 하지만 토마스 선교사에게 있어, 조선에서의 2개월 반은 복음의 불모지인 조선에 장차 하나님의 사역을 뿌리내리기 위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간이었다.

 

토마스 선교사가 북경으로 돌아온 시점에 때마침, 런던선교회에서 서신이 왔다. 내용은 선교사 복직 통보였다. 사실 토마스는 조선에 가기 전, 선교사 복직에 연연하지 않고, 런던선교회에 조선의 선교 계획과 각오에 대한 편지를 다시 보냈는데, 런던선교회와 당시 회장인 티드만은 그의 진심을 확인하고 선교사 복직을 가결해 줬던 것이다.

 

그리하여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조선 선교의 준비를 해나갔다. 준비를 하면 할수록 그의 조선 선교에 대한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러나 그가 2차 조선 선교를 준비할 무렵, 당시 복음적인 관점에서 조선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권력을 잡은 흥선

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있었고, 1866년 최대의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를 일으켜 약 8000명의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주교 9명이 처형됐다(병인박해 때 천주교도들이 처형된 곳이 서울 양화진의 절두산이다).

 

또한 천주교 서적을 불태우고, 1485년 한명회가 발의한 ‘오가작통법’을 재도입해 천주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감시했으며, 해안은 철저하게 봉쇄됐다. 한 마디로 토마스 선교사가 다시 조선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막힌 것이었다. 비극적인 병인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3명의 주교가 있었는데, 그 중 1명이 프랑스의 리델 신부였다. 그는 조선에서 중국으로 극적으로 탈출해, 프랑스 대사관에 병인박해에 대해 알렸다.

 

이에 프랑스 대사관은 자국민이 처형된 것에 분노해 중국 해안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해군함대를 조선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해군은 조선 원정을 준비하면서 통역관이 필요했는데, 이때 조선어를 약간 배웠던 토마스 선교사에게 동행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함대로 조선에 가는 것에 주저했으나, 조선으로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에 합류를 결정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라는 프랑스 정부의 명령으로 프랑스 함대의 조선행은 취소됐으며, 이로 인해 토마스 선교사의 조선 재입국은 좌절됐다.

 

이후 그는 조선으로 갈 길을 모색하고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세관으로 일했던 항구도시 즈푸로 다시 돌아갔다. 어느 날 즈푸항에 커다란 배가 입항했다. 그 배의 이름은 바로 ‘제너럴셔먼호’였다.

 

백정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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