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블리스침례교회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전하며 기도하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우리의 삶으로 이웃에게 전하는 것 또한 교회가 감당해야 할 귀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우리 주변의 가장 연약한 생명들을 교회가 어떻게 품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가정의 어려움으로 보호가 필요한 영유아들을 만나게 됐고, 작은 마음을 모아 영유아 공동생활가정(그룹홈) 사역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아이들을 돌보다 보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영유아들은 자신의 상황을 말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습니다. 배가 고프면 울고, 아프면 울고, 무서워도 울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면 결국 사랑과 안정적인 돌봄이라는 답에 이르게 됩니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정성껏 먹이고, 깨끗하게 씻겨주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어쩌면 아주 평범한 일처럼 보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그 평범한 일상이 세상을 믿고 살아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박물관에서 전시할 유물을 선정할 때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까? 한 시대에 속한 다양한 유물 가운데 전시품을 선정할 때는 일반적으로 일정한 기준이 적용된다. 예술성, 희귀성, 보존 상태, 독창성, 기술적 완성도는 물론,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상징성과 시대정신 및 물질문화를 얼마나 잘 보여 주는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 기원전 5000~3300년은 고고학에서 금석병용기 시대(Chalcolithic Period) 로 불린다. 흥미롭게도 이스라엘 박물관은 이 시대를 ‘종교의 발전기’ 라고 명명한다. 실제로 박물관 진열대에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우상(idol)과 제의용 유물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물론 금석병용기 유적에서 우상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박물관이 이 유물들을 중심에 배치한 것은, 그것들이 이 시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대표적 유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금석병용기 시대는 어떤 사회였을까? 이 시기에는 이전의 신석기 시대보다 집단생활이 더욱 발전하고 사회 조직이 한층 복잡해졌다. 농업과 목축이 크게 성장했고, 구리 제련 기술이 시작되었으며, 장인의 전문화와 장거리 교역도 활발해졌다. 아미하이 마자르(Amihai
인공지능(AI)이 가져온 변화는 단지 편리한 도구 하나가 늘어난 차원이 아니다. AI는 인간만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언어와 지능을 자원화하고 상품화했다. 이제 목회자와 기독교 리더들이 던져야 할 질문은 “AI를 어떻게 사역에 활용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그보다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은 “AI 시대에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가?”이다. 어떻게(How)가 아닌 무엇(What)인 것이다. 지식 생산 비용이 ‘0’이 된 시대 역사적으로 지식과 글을 생산하는 일은 깊은 묵상과 수고, 그리고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설교 한 편을 준비하기 위해 목회자는 성경을 연구하고, 주석을 살피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씨름하는 시간을 거쳤다. 그러나 AI는 지식과 글 생산의 비용을 거의 ‘0’에 가깝게 만들었다. 이제 몇 번의 클릭만으로도 정교한 설교 구조와 성경 배경, 적절한 예화가 포함된 설교 개요를 몇 초 만에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치명적인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지식의 생성이 쉬워졌다고 해서 영적 형성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정보는 빠르게 만들어질 수 있지만, 사람의 영혼은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믿음은 데이터의 축적이 아니라 하나
주전 10,000~5000년 사이를 신석기 시대(Neolithic)라고 부른다. 수렵생활을 하던 인류가 드디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던 시기이다. 그러니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당연히 정착생활, 집단생활, 또 그에 필요한 도구들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정교하게 발전했을 것이고, 집단생활을 효과적으로 영위하기 위해서 그에 따르는 사회조직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후반부(주전 6400~5800)에 이르러 사람들은 드디어 흙을 이용해서 다양한 크기의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런 문화는 이스라엘 어느 곳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출애굽 당시 성경에 등장하는 여리고 도시가 그중에 하나였다. 여리고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의 도시로 알려졌다. 하지만 신석기 후반부(주전 6400~5800)의 토기 문화가 가장 왕성하게 발달하고 근동지역에서 최초로 가장 혁신적인 농사 문화의 발전을 이루고 선도했던 도시는 따로 있었다. 그곳은 갈릴리 호수 남쪽에 위치한 장소였다. 신석기시대 후반부에 이 지역에서 일어난 문화를 학자들은 ‘야르묵키안 문화’(Yarmukian culture)라고 부른다. 그 가운데
1884년 이후 조선에 들어온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단순한 부흥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순수한 학자 집단도 아니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확신했고, 개혁주의 교리를 소중히 여겼으며, 동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모펫(Samuel Austin Moffett), 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 등은 모두 이러한 전통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조선에 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교회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성경을 번역하고, 학교를 세우고, 교역자를 양성하고, 신학 교육의 기초를 놓는 일이었다. 그 결과 초기 한국교회는 말씀 중심의 교회가 됐다. 성도들은 성경을 배우기 위해 먼 길을 걸어 사경회에 참석했고, 말씀을 읽기 위해 한글을 배웠다. 성경을 아는 것이 곧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모습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개혁주의 전통의 열매였다. 1901년에 설립된 평양신학교는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중심지였다. 이곳에서는 성경 연구와 설교, 교리 교육이 매우 중요하게 다뤄졌다. 신학생들은 단순히
수련회 마지막 날, 우리는 모두 한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이켜보면 이 한 마디에는 짧은 인사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지난 수련회의 깊이가 담겨 있습니다. 지난 1년, 인도네시아 지부는 깊은 아픔의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동료 선교사의 큰 사고와 수술, 그리고 52세의 한 여성 선교사님의 갑작스러운 소천은 지부 전체에 깊은 슬픔을 남겼습니다. 그 아픔을 지나 처음 맞이하는 수련회였기에, 이 시간이 회복과 하나됨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렇게 정해진 주제가 바로 ‘회복, 하나됨’이었습니다. 지난 2025년 11월 말, 2026년 인도네시아 지부 수련회를 침례교 총회 임원 목사님들께서 섬겨주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걱정과 부담이 먼저 앞섰습니다. 한 번도 뵌 적 없는 강사님들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걱정이 됐습니다. 그러나 수련회를 준비해 가는 과정 속에서 그 부담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총회 해외선교부장 목사님께서는 지부에서 계획한 일정과 순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셨고, 무언가를 요구하기보다는 선교사들을 더 잘 섬기고 싶어 하시는 마음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수마트라섬의 메
나사렛 예수와 세 명의 증인 -그래도 다행이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2010년에 새롭게 단장했다. 당연히 박물관이 어떠한 모습으로 바뀌었는지 많은 기대를 했었다. 새롭게 단장한 이후 처음 박물관에 갔을 때 앞서 말했듯이 입구에 사람 모양을 한 토관이 전시되어서 좀 의아해했다. 물론 이 사람 모양의 토관이야 책에서 봤기에 초면은 아니었지만 ‘왜지?’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이 유물보다는 성경과 보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물도 있는데 말이다. 2017년 안식년을 맞이해서 ‘골리앗의 고향 가드’의 발굴 작업에 참여한 다음, 작심하고 이스라엘 구석구석을 답사하며 다닐 때 그 대상지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전국에 흩어져 있는 박물관들을 답사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단연코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을 열심히 들락날락했다. 유물 앞에 앉아 한없이 바라만 보기도 하고, 2000년 3000년 타임머신을 타고 유물의 주인공과 교감하는 그런 일은 참 신비로웠던 기억으로 남는다. 그때 알았던 사실이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지독하게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디자인됐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난다. 박물관은 입구에 사람 모양의 관들을 전시해 놓
아프리카 중부 탄자니아에서 출발한 코끼리 가족, 물소 떼, 기린, 코뿔소 무리들이 풀을 뜯으며 홍해 바다 기슭을 따라 올라와 아라바 계곡을 지나고, 숲이 우거진 사해 바다 주변을 통과한 후 악어들이 우글대는 갈릴리 호수를 향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는가? 이스라엘 고고학 박물관에 들어서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선사시대 유물 전시실에는 우리에게 이런 상상을 하도록 만드는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벽에 커다란 뿔 화석이 눈에 들어온다. 이 뿔의 너비는 약 2m에 달한다. 그 거대함으로 보아 당시 이 동물이 얼마나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옆에는 코끼리 이빨과 상아, 그리고 일명 ‘갈릴리 사람’의 두개골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 유물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요르단 계곡(Jordan Valley)에 위치한 우베이디야(Ubeidiya) 구석기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된 동물 뼈와 사람의 유골(cast)이다. 약 150만 년 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구석기 시대 유물은 지난 1959년 5월, 갈릴리 호수 남쪽 ‘키부츠 아피킴(Kibbutz Afikim)’의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물 장구질 텀벙거리며 개헤엄 쳐본다 여지껏 간직해온 동심이 송사리 피라미와 어울려논다 여름 개울에선 물놀이 즐기는 아이 뿐 외로운 노인은 없었다 물수제비를 던졌다 따라하는 낯선 아이와 차례대로 던지는 게임 즐겼다 초등학교 1학년 남아와 칠순을 넘긴 노인 마음 열고 말문이 터졌다 “할아버지 집에 놀러가고 싶어요” “언제든오렴, 우린 물수제비 놀이친구야”
피터스 선교사는 제주에서의 짧은 체류를 가졌다. 그가 제주에서 만난 사람들과 풍경은 분명 그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런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향한다. 얼핏 보면 아쉬운 장면이다. 어렵게 조선말을 배우고, 최초의 한글 구약 번역인 ‘시편촬요’까지 펴낸 그가 왜 태평양을 건넜을까? 혹시 조선에서의 사역이 지쳤던 것은 아닐까, 혹은 낯선 조선 생활을 견디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의 삶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피터스가 향한 곳은 미국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였다. 권서인으로서 조선 방방곡곡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구약성경의 첫 한글 번역인 ‘시편 촬요’를 세상에 내놓았지만, 정규 신학 교육을 받지 않은 그에 대한 선교사 사회의 신뢰와 지지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마도 개인 스스로도 신학 교육에 대한 갈급함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피터스는 신학 공부를 결심하고 미국으로 떠난다. 당시 미국 성서공회 총무였던 루미스(H. Loomis)가 미국 성서공회 길만(Edward W. Gilman) 박사에게 보낸 서신에서 “피터스가 시카고에 가서 9월부터 신학을 공부할 것이며 그 후 정식 선교사로 한국에 다시 돌아올 계획”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