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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부감(富感)

하늘붓 가는대로 –182


돈이 하도 많아서 돈 걱정 안하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무료할까. 자나 깨나 집안에서나 밖에서나 돈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 중에는 영 재미없어서 못 살겠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꽤나 많이 있다. 그런 상태가 심하면 돈덩이 위에서 생을 결단내는 자도 있다.

 

우유 먹기가 힘들었던 한국 1970년도에 유행어가 생겼다. 우유 배달원은 강하고 앉아서 우유 받아먹는 자는 약골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농촌에서 자라서 똑똑히 본 광경이 있다. 부잣집 맏아드님은 공자처럼 농일없이 그늘나무 밑에서 논어, 맹자 글을 읽는데 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갓 나온 아침 잠자리 같았다. 그의 아범은 자식 강하라고 씨암탉 잡아 보양해 주지만 아들의 약골의 모습은 여전했다.

 

그런데 그 집에 일꾼으로 들어온 머슴은 권투선수처럼 골육이 강했 다. 머슴에게 보양식을 안길 턱은 없고 주인이 주는데로 물론 식사는 건너지 않고 착실히 먹었는데 결과는 딱하게도 그 집 아드님은 조사(早 死)하고 머슴은 소 몰고 들로 가더라는 장면.

 

나는 극단적인 경우를 상상해보았다. 아주 돈은 많은데 자기가 쓰기에도 지루하고 또 딱히 어디에 어떻게 쓸 줄도 모르는 부자의 따분함을 택하랴. 혹은 돈이라면 언제나 호주머니가 배고파하면서 어쩌다가 한 푼 들어오면 천냥 부자인양 신나게 쓰다가 또 그 고비가 넘어가면 또 돈걱정 안하고 사는 약간의 긴장된 삶의 재미를 택하랴. 많은 사람들은 그 어느 정도 아닌 중도를 택할 것이리 라. 이런 세상에 살아가는 그리스도 인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성경이 답을 주고 있었다.

 

사도는 딴 벌이가 없이 교인의 헌금으로 먹고 살고 선교했다. 그러나 사도는 일체 자족하기로 체득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 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4:11~14) 그러나 사도는 재물 아닌 사람을 구한다고 했다.

 

사람을 구하다보니그 사람과 함께 재물은 그냥 따라오는 것이 아니련가! “보라 내가 이제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후12:14~15) 그리스도인은 세상 부자들에게 아부할 것이 아니라 사도처럼 충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가지지 않았 으나 가진 자에게 당당하게 대하는 것은 저들의 가진 것 이상의 어떤 것의 소유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빈감(貧感)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부감(富感)의 소유자다. 법정스님도 무소유를 즐겼다고 하지 않나. 참으로 불쌍한 사람은 돈뭉치를 앞에 놓고 재미없다고 투덜대는 사람일 것이다. 그 재미를 깨기 위해 나온 동작이 탈 인간적 발작이다. 사회악이다. 이들에 게는 빈감도 부감도 없는 무중력상태다.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

하나님 앞으로 물질을 가지고 와서 살아보라.”

권혁봉 목사 / 한우리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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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의 유산을 넘어 다시 희망의 깃발을 듭시다!
존경하는 침례교 동역자 여러분! 그리고 전국의 3500여 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합니다. 저는 교단의 내일을 가늠할 중요한 길목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에게 미래를 열어준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30년 전 우리 선배들이 눈물로 심었던 그 거룩한 씨앗을 기억해야 합니다. 30년 전, 우리에게는 ‘거룩한 야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3000교회 100만 성도 운동’이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외쳤던 구호는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침례교회가 한국 교회의 희망이 되겠다”는 당찬 선언이었으며, 복음의 능력으로 시대를 돌파하겠다는 영적 결기였습니다. 그 뜨거운 구령의 열정이 있었기에 우리 교단은 한국 교회사에 부흥의 이정표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열정의 거룩한 불씨는 꺼지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우리는 104차 총회에서 ‘부흥협력단’이라는 아름다운 동역의 저력을 통해, 개교회주의를 넘어 ‘함께하는 부흥 목회’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하며 우리는 ‘상생’이라는 침례교만의 독특한 저력을 확인했습니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