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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영감성

쉽게 쓴 조직신학이야기 - 7
조동선 교수
한국침신대(조직신학)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절대 무오한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성경론에서 구별돼야 하는 세 가지 신학용어가 있다. 계시(revelation), 영감(inspiration), 조명(illustration). 계시는 성령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진리와 자신의 피조물을 향하신 그분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선지자들을 통해 주어졌다(엡 3:5; 벧전 1:11~12). 영감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언어로 오류 없이 기록되도록 성경 저자들과 성경이라는 문서를 산출하시는 과정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로 정경 66권이 완성되면서 계시와 함께 과거에 종결되었다(벧후 1:20~21; 딤후 3:16). 조명은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독자들이 바르게 이해하도록 돕는 성령님의 역사로 현재에도 계속 진행 중이다(고전 2:9~14).     


성경이 오류 없는 하나님의 계시로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성경 이외의 그 어떤 책도 가질 수 없는 성경의 신적 저자이신 성령님의 초자연적이며 직접적인 감화와 감독이 성경의 인간 저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벧후 1:20~21). 그 결과로 성경의 인간 저자들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해 준 것을 정확하게 기록해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게 됐다(딤후 3:16). 벧후 1:20~21은 성경이라는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1:19 the prophetic word, ESV)을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데 그 이유는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기록하고 해석했기 때문이다(새번역).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에게 이끌림을 받았다(“하나님의 감동을 받았다”-개역개정)는 의미는 정확히 무엇인가? “이끌림을 받았다”는 헬라어 동사는 사도행전 27:15에서 사도 바울이 탄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driven along)”라는 문장에도 사용됐다. 유라굴로라는 광풍으로 인해 사도 바울이 탄 배는 원래 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그 광풍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광풍이 부는 방향대로 배가 이끌려 갔듯이, 성경의 인간 저자들은 성령의 강력한 능력에 의해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성경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부족함과 오류로부터 보호됐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표현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성경으로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성령의 강력한 감독과 능력주심이 아니었다면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그리고 사도적 저자들)이 아무리 계시를 받았다 해도 그들이 자신들의 능력으로만 성경을 기록했다면 여러 오류를 발생시켰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1:20~21이 영감의 과정에서 성령께서 성경의 인간 저자들에게 역사한 것을 진술했다면, 디모데 후서 3:16은 같은 성령께서 성경이라는 문서의 최종적 산출에 역사하심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하나님의 감동”(개역개정) 혹은 “하나님의 영감”(새번역, NIV, KJV)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떼오뉴스토스(theopneustos)”로서 “하나님의 호흡해 내심으로 생겨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입에서 그분의 호흡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성경의 기원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또한 ‘떼오뉴스토스’는 성경의 기원 뿐만 아니라 영감의 최종 산물인 성경이라는 문서가 하나님의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세나 바울이 자신들의 종교적 경험과 지식에 근거해 만들어 놓은 경건 서적을 선택해 그 서적이 성경으로서의 기능을 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세오경과 바울의 서신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호흡으로(성령의 역사로) 성경으로서 산출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의 영감이 성경의 단어와 표현들이 아니라 사상들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성경이라는 헬라어 그라페(graphe)는 사상이 아니라 기록된 문서를 뜻한다. 마태복음 4:4에서 예수님은 마귀를 물리치실 때 사용하신 신명기 8:3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셨다. 창세기 1:1에서 요한계시록 22:21까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호흡해 내심의 결과이기 때문에 성경 안에 기록된 신학과 윤리에 대한 교훈 뿐 아니라 자연과 역사에 대해 기록된 모든 부분도 하나님의 의도하심에 의해 기록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성경의 사상뿐만 아니라 성경[성경 저자들이 직접 쓴 성경 원본]에 있는 모든 단어와 문장 구조까지도 영감을 받았다는 믿음은 ‘축자영감성’으로 설명 될 수 있다. 예수님과 바울의 성경관에는 이 축자영감성이 잘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18에서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 ‘구약성경’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셨다. ‘일점일획’에서 일점에 해당하는 헬라어 ‘이오타’는 헬라어 알파벳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수직 형태의 일자모양이다. 만일 마태가 히브리 구약성경을 생각했다면 ‘요드’라는 히브리 자음 중 가장 작은 단어일 것이다. ‘요드’는 때로 문장의 의미에 변화를 주지 않는 사소한 단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일획’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작고 비슷해 보이는 철자들 사이를 구분해 주는 작은 문장 구호이다. 


예수님은 시편 110:1에서 다윗의 “성령의 감동되어” 그리스도를 “주”라 칭했는데 그렇다면 다윗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자신의 대적자들을 잠잠하게 하셨다. 이 신학적 논쟁의 핵심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내 주(my Lord)”라고 부른 것에 있다. 다윗은 일인칭 소유격인 ‘나의’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자신이 경배해야만 할 신성을 지니신 아도나이이심을 암시한 것이다. 만일 다윗이 ‘나의’라는 단어 대신 비슷한 히브리어가 의미하는 ‘그의’ 혹은 ‘당신의’라는 다른 소유격을 사용했다면 예수님의 논리는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이 선택한 별 의미 없어 보이는 ‘나의’라는 소유격이 사실은 성령의 감동으로 사용된 것으로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지적하셨다. 바울은 성경이 아브라함과 그의 한 자손에게 주어진 언약에 대해 기록할 때 복수 형태의 ‘자손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수 형태인 ‘자손’을 사용했다는 것을 강조했다(갈 3:16). 물론 바울은 ‘자손’이라는 단어가 집합형 단수로서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는 복수의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롬 4: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는 구약에 주어진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가 복수의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 안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됨을 강조한 것이다. 바울의 이런 성경의 단수 용법에 대한 신학적 강조는 성경의 단어가 우연히 채택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축자 영감성은 성경 저자들이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쓰기하듯 직접 그대로 적어 내려간 부분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출 34:27; 렘 36:4; 계 2~3). 그래서 2세기 말 아테나고라스 같은 교부는 성경의 인간 저자들이 하나님께서 연주하시는 플릇에 해당한다고 비유했다. 그러나 이런 비유는 인간 저자의 인격적 역할을 부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정확하게 기록된 것이 성경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경의 인간 저자의 인격성을 부인하며 인간 저자를 단순히 하나의 펜과 같은 존재로만 보는 기계적 영감성은 이슬람의 코란에 적용될 수 있다. 반면 성경의 신적 저자인 성령은 인간 저자의 개성과 글쓰기의 특성을 무효화하지 않았다. 의사 누가와 베드로의 문체는 다르며, 누가의 글은 심지어 바울의 것과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누가는 예수님에 대한 신중한 역사적 연구와 의사로서의 지식이 반영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다. 하나님과 인간의 유기적 일치성은 구원의 문제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책임감이 보여주는 일치성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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