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그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을 소유로 받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7~8)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15장 1절 이후 대화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 방패와 상급이 되어 주겠다고 말씀하시자 2절에서 아브람은 방패가 있어도 아들이 없으면 소용없다고 투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받아주시면서 3절부터 5절까지 상속자에 대한 약속을 다시 한 번 주십니다. 6절에서 말씀을 받아들인 아브람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고 이어지는 구절에서 땅에 대한 약속을 재확인해 주셨는데, 8절에서 난데없이 아브람이 증거를 요구하고 나선 겁니다. 미래 후손에 대한 약속까지는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당장 이뤄질 수 없다는 것도 알았는데 땅 약속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나 봅니다. 약속을 주실 때마다 마음으로는 믿었어도 실제로는 언제나 빈 손이 었죠. 땅이라는 구체적인 축복이 언급되자 이번만큼은 담보를 잡아야겠다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무엇으로 아나요?”라는 말은 곧 “내가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보여 주세요”라는 말이나 다름없거든요. 이제껏 잘 믿어 왔고, 앞으로도 믿겠지만, 지금은 증거를 손에 쥐고 싶은 사람 마음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신앙이어서 아브람을 의롭게 여기시지 않았습니다. 사람 마음이 때로 흔들리고, 눈에 보이는 증거를 바라기도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시지 않거든요. 하나님의 약속과 사람의 믿음 중 더 의심스럽고 증거가 필요한 것은 당연히 사람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믿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는데 사람이 하나님께 증거를 요구한다면 이것처럼 모순된 일이 없죠. 지금 아브람이 그런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땅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살면서 땅이 아쉬운 적은 많지 않았을 테니까요. 아브람이 정말로 원한 것은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는 분인지 아닌지에 관한 확인이었습니다. 그것만 확인되면 불가능해 보이는 아들 약속도 이루어지리라 확신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창 15:9)
하나님은 이것까지도 받아주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삼 년 된 암소와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같은 동물을 죽여 반으로 자르게 하셨죠. 죽은 동물 조각 사이로 약속 당사자가 함께 걸어가는 의식은 당시 사람들이 중요한 약속을 할 때 사용한 방법이었습니다. 약속을 어긴 쪽이 이 동물처럼 죽임을 당하리라는 다소 소름이 끼치는 의미가 담긴 방식이었죠. 어디까지나 인간 사이에 통용되는 약속 방식이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할 수 있는 의식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약속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죽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인간의 관례와는 달리 하나님 혼자 횃불을 지나가는 일방적인 방식으로 약속을 인증해 주셨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 약속이었지만 내용상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없었죠. 믿기는 해도 손에 잡히지 않아 허전한 마음이었던 아브람에게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증거가 됐을 겁니다. 이것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하나님께서 또 다른 말씀을 덧붙여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 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네 자손이 큰 민족이 될 것이다’, ‘자손의 숫자가 별만큼, 땅의 먼지만큼 많을 것이다’라던 이전의 약속에 비하면 놀랍도록 구체적인 약속입니다. 후손이 이방에서 400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큰 재물과 함께 돌아오리라는, 구체적인 기간이 명시된 말씀이니까요. 너무 자세해서 약속보다 예언에 가깝게 느껴지기까지 하네요. 애굽 땅에서 겪었던 일이 이 예언의 일부였음을 생각조차 못했을 아브람은 이런 이야기를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의 재확인으로만 받아들였을 겁니다. 기록에는 없지만 제단도 쌓았을 것 같네요. 하나님의 약속이 전보다 구체적이기는 해도 독자는 이것마저도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자꾸 돌려서 말씀하시는 걸까요? 언제, 어디에서, 이삭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사래를 통해 태어난다고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면 되는데, 어째서 ‘네 몸에서 날 자’와 같이 두루뭉술한 표현을 써서 혼란스럽게 만드시는 걸까요? 이어지는 16장에서 아브람이 겪을 고통도 이같은 약속의 모호함 때문인지 모릅니다. 물론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알지 못하면 아브람은 물론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불확실하고 믿기 힘들다고 여길 수밖에 없겠죠.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기로 한 약속은 믿음의 대가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셨다는 단순한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약속이 답답하고 애가 타서 증거를 손에 넣으려고 애쓰는 거죠. 아브람이 간절해 보여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처음부터 이삭이 있었고, 그가 아브람의 아들로 태어나도록 예정하셨기 때문에 그의 아들로 태어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기분을 맞추지 않으시는 이유입니다. 아브람의 성장 역시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가 성장하도록 도와주시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조금씩 더 알려 주신 것이죠.
누구나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원래 힘들고 어려워서가 아니라, 자기 믿음에 대한 기대를 실제 삶이 따라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 정도 힘든 일은 거뜬히 이길 것 같고, 이 정도 고민은 문제없이 해결할 것 같지만, 막상 일이 닥치면 제자리만 맴도는 기분이 들죠. 이를 가엾게 보신 하나님께서 종종 약속의 증거를 주시기도 하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아무런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오직 믿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버텨야 하는 사람이 훨씬 많죠. 어쩌면 이것이 믿음의 본질일 수도 있습니다. 약속이 언젠가 반드시 이뤄진다는 생각으로 오늘의 불확실함을 견뎌내는 힘 말이죠. 흔들리는 믿음을 붙잡은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모습에 한 발 더 다가갔습니다만 진짜 위기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상속자가 없다는 냉혹한 현실이 조만간 더 큰 문제를 일으킬 테니까요.
유수영 목사
제주함께하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