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창 24:4) 사라를 장사하고 난 뒤 아브라함은 이삭의 결혼을 서두릅니다. 전에 연락이 닿았던 나홀 집안에서 신붓감을 고를 참이었죠. 아브라함이 직접 먼 길을 여행하기에는 건강이 허락지 않았던 데다가 마땅히 대신할 사람도 없었기에 이 일은 늙은 하인에게 맡겨집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상속자라고 이야기했던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과 같은 사람(창 15:2)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창세기가 그의 이름을 확인해 주지 않아서 같은 사람이라고 완전히 확신할 수 없으니 그저 하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네요. 하인은 아브라함을 대신해 신부를 고르고 결정할 권한을 부여받고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과제를 멋지게 해내게 되죠.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창 24:12) 하인은 시작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고 나홀 집안사람을 향해 때로는 겸손하게, 때로는 단호하게 자기 견해를 밝히며 어려운 협상
키르케고르는 1847년 ‘사랑의 실천’을 쓸 당시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긴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주관적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객관적이다. 때로는 끔찍할 정도로 객관적이기도 하다. 아, 그러나 과제는 바로 자신에게 객관적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주관적이 되는 것이다.”(NB2:57, Pap. VIII1 A 165)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키르케고르에게 이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고통을 겪습니다. 특히 삶에서 많은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가해자에게 더욱 주관적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키르케고르는 다른 일기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셨음을 숙고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위안이자 절대적 해방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올바르게 이해된 객관성과 올바르게 이해된 주관성을 갖게 된다. 곧, 타인에게는 객관적이고, 자신에게는 주관적이 된다.” 일반적으로 국가나 단체에서 회의를 개최할 때에는 발언을 개별적인 사
이 일 후에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창 22:20) 브엘세바로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이삭의 결혼이었을 겁니다. 미리 정해 놓은 결혼 상대자가 없었으니 신부가 될 사람을 찾아야 했는데, 한 군데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 떠돌며 살아온 아브라함이었기에 신붓감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웃한 부족은 문화도 다르고 종교 차이도 커서 알아보고 싶지 않았을 테고, 집안 식구 가운데 이삭의 배필을 찾으면 좋겠는데, 고향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됐고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던 롯 가족이 몰락하고 나니 그마저도 불가능했습니다. 바로 그때 뜻하지 않게 동생 나홀에게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창세기 11장 족보를 살펴보면 데라에게 아브라함, 나홀, 하란의 세 아들이 있었다고 나오는데, 하란은 일찍 죽었고 데라가 갈데아 우르를 떠날 때 아브라함과 더불어 하란의 아들 롯을 데리고 나왔다는 기록이 있을 뿐 나홀의 행적은 따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난 뒤에도 나홀은 여전히 고향에 남았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제야 근황을 알게 된 것이죠. 소식을 가져온 사람을 만난 자리에서 아브라함은
속마음은 까맣게 타들어 갔겠지만 적어도 주변 사람에게는 태연하게 보였습니다. 장작을 쪼개고 짐을 꾸린 후 이삭과 하인 두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모리아 땅을 향해 길을 떠났죠.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삭을 데리고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차마 보기 힘들었을 겁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모리아 땅을 향해 떠난 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두 명의 하인은 여행길에서 함께 식사하고, 휴식을 취하고, 짐을 나눠 지고, 반짝이는 별빛 아래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 와중에도 아브라함은 자기 안에 있는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과 일상을 보내며 가슴 아픈 여행을 계속했죠. 그가 길에서 보낸 72시간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모리아 산이 눈에 들어오자 아브라함은 두 명의 하인을 기다리게 하고는 이삭과 단둘이서만 산에 오르게 됩니다. 22장 5절에서 하인에게 이삭과 함께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혹시나 이
하갈과 이스마엘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자 오래된 아브라함 집안 문제 하나가 해결됐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사람의 노력으로 약속을 대체했던 결과가 하갈과 이스마엘이었는데, 이들이 떠남으로써 고민도 사라지게 되었죠.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걱정거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됐고 사라도 인생 소원을 풀었으니 이삭이 잘 성장해 유업을 물려받기만 하면 다 풀리는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나타나시더니 또다시 기막힌 사건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 인생은 정말이지 반전의 연속이네요.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창 22: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가 창세기 12장이었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그와 동행하시며 새로운 이름과 아들을 주시면서도 아브라함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신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나셔서 자신의 말씀만 하시고는 사라지셨죠. 그런데 이번에는 “아브라함아!”라고 직접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대답은 성경에서 자주 보이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대화 형식인데 아브라함
경솔함을 책망하지도, 불경함을 징계하지도 않으시고 오히려 더 큰 선물로 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비웃음도 쓴웃음도 아닌 진정 행복한 웃음을 가질 수 있게 됐죠. 이 일로 사라는 할례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하게 됐습니다. 배 속에서 아이가 자라는 열 달 동안 자기 몸 안에 살아 있는 어린 생명을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손길을 느꼈겠죠. 이때가 사라에게는 신앙의 절정이었습니다. 문제는 절정이 지난 바로 그때에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창 21:9~10) 사라의 신앙고백이 나오자마자 창세기는 급격히 현실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시작은 아브라함이 베푼 이삭 탄생 축하 잔치였죠. 이삭이 젖을 떼자마자 아브라함이 성대한 잔치를 벌였는데, 이 자리에서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장면을 사라가 목격하게 됩니다. 발끈한 사라가 아브라함을 다그쳐 세웠습니다. 이스마엘을 하루빨리 내쫓으라고 말이죠. 이런 사건은 당사자 입장이 되어 보면 이해하기 좋습니다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창 20:1~2) 창세기 무대에서 롯이 사라진 후 아브라함의 헤브론 생활도 그렇게 순탄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남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에서 그 이유를 찾기는 어려운데요, 이전처럼 기근이 심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장막을 나오면 폐허가 된 소돔이 보이는 헤브론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아브라함은 남쪽을 향해 내려갔고, 애굽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는지 헤브론과 애굽 중간에 있는 그랄이라는 곳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랄은 애굽과 달리 아브라함에게 안전했을까요? 안타깝게도 애굽에서 겪었던 일을 그랄에서 똑같이 겪게 됩니다. 안전을 위해 사라를 누이동생으로 소개했고, 바로가 그랬던 것처럼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데려가고 말았죠. 창세기 독자로서 이 부분을 읽으면 답답한 마음이 앞섭니다. 아브라함은 왜 이렇게 비겁한 모습을 반복할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만큼 받았고, 신앙 체험도 누구 못지않게 많이 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분명하게
믿음과 신념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개척하기보다 지금 눈에 보이는 환경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고자 했던 롯의 인생이 두 딸에게 그대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 그러나 아버지는 그 딸이 눕고 일어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창 19:35) 창세기 19장 35절은 성경에 기록된 롯의 마지막 행적입니다. 큰딸과 작은딸이 연이어 자신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술에 취해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홍수 재앙을 겪은 후 술에 취한 채 민망한 실수를 범했던 노아의 만년이 묘하게 겹치는 장면이며, 롯의 인생이 그야말로 바닥까지 추락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롯이 왜 이렇게까지 망가졌을까요? 처음부터 죄로 가득했던 소돔을 떠날 수는 없었을까요? 차라리 아브라함에게로 가서 새 인생을 사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요? 롯이 꿈꾸고 쫓았던 모든 것은 바벨탑을 쌓는 일과 같았습니다.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단단한 탑을 쌓고 또 쌓으며 앞만 보고 살아왔습니다. 그 시작은 아브라함을 따라 하란을 떠난 때부터였을 것입니다. 처음 고향을 떠날 때는 타지에 가서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근을 피해 끊임없이 이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창 19:15~16) 소돔 주민과 롯이 갈등을 겪는 동안 천사들이 소돔의 타락상을 현장에서 파악했기에 심판은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본격적인 심판이 있기 전에 우선 롯 가족부터 피신시키려 했죠. 그런데 창세기는 심판이 임한다는 긴급한 소식을 들은 롯이 탈출을 주저했다고 기록합니다. 롯의 속마음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 주는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 한때는 소돔의 중심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 목표였지만 지금은 그간 이뤄낸 모든 성취가 미련으로 남아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가족의 안위보다 자기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태도가 다시 한번 드러났죠. 보다 못한 천사가 강제로 끌어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도 실은 롯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봐서 한 행동이었습니다(창 19:29). 보소서 저 성읍은 도망하기에 가깝고 작기도 하오니 나를 그 곳으로 도망하게 하소서 이는 작은 성읍이 아니니이까 내 생명이 보존되리이다(창 19:20) 천사가 재앙을 피하려면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지만, 롯은 눈에 보이는 작은 성을 가리키며
롯이 소돔에 이주한 뒤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과 떨어져 나와 소돔에 정착한 이래 아브라함이 왕들의 전쟁, 횃불 언약, 이스마엘 탄생과 성장, 할례 등을 거치는 동안 롯은 소돔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은 채 조금씩 자기 위상을 높여갔죠. 안타까운 점은 소돔에서 지위가 올라간 만큼 내면이 성장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결과만 보면 롯에게는 안정적인 소돔보다 고달픈 광야 생활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창 19:1) 두 천사가 소돔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두 천사가 가장 해가 뜨거운 대낮에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식사한 후 소돔으로 갔기에 도착할 즈음에는 저물녘이 됐는데, 밝은 낮과 어두운 밤이라는 전혀 다른 배경은 아브라함과 롯이 처한 상황을 대조해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파트너라는 인정과 함께 상속자에 대한 복이 약속됐고 롯에게는 멸망이라는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요. 나그네를 만난 아브라함과 롯의 태도를 비교해 보아도 흥미롭습니다. 앞서 본 대로 아브라함은 극진함을 넘어 호들갑에 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