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지역의 교회들을 순회하며 돌봤던 신성균 목사는 하루에 100리 길을 걸으며 예배를 인도했고, 교회와 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1927년부터는 충청북도 제천구역에서 사역하면서 인근 예천구역과 경상북도 포항구역까지 순회했다.
1942년 9월 6일 경상북도 점촌에서 활동하던 신성균 목사는 일본 경찰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이는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교단의 지도자급 인사들에 대한 체포의 일환이었다. 그는 체포되어 이내 원산으로 압송이 됐는데, 이때 경상북도 점촌에서 함께 활동하던 김주언 감로와 이덕상 감로도 함께 압송됐고, 이곳 헌병대 유치장에서 혹독한 겨울을 보냈다. 신성균 목사가 체포되었을 당시 45세로, 체포된 다른 분들에 비하면 젊은 나이었으나, 일제의 고문에 따른 탄압과 열악한 옥중생활을 견디기에는 어려웠다.
그는 이듬해인 1943년 5월 1일 함흥 교도소로 이감되어 15일간 재판을 받았는데, 그 결과 함께 검속된 32명 중 그를 비롯한 이종근·김영관·전치규·노재천·장석천·박기양·백남조·박성도 등 9명의 교단 지도자는 일본의 검사에 의해 예심에 회부되어 재차 투옥됐고, 다른 23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1943년 5월 15일에 석방됐다. 신성균 목사는 조선총독부 검사 와타나베 레이노스케에 의해 1943년 5월 28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 예심이 청구됐다.
고문과 취조로 인한 수감생활로 신성균 목사의 건강은 날로 쇠약해졌고, 급기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에 일제는 1944년 2월 15일 다른 6인(김영관·백남조·장석천·노재천·박기양·박성도)과 함께 그를 병보석으로 임시출옥시켰다. 출옥 후 신성균 목사는 원산 반도의원의 차형은 원장(감리교 장로)의 호의로 병원에 입원해 여러 날 간호를 받았다. 점차 건강을 회복하던 와중에 같은 해 5월 10일 함흥재판소는 동아기독교회에 교단 해체령을 공표하였다. 그리고 임시출옥했던 신성균 목사는 1944년 8월 8일 일제에 의해 재수감 되어 공판이 계속됐고, 9월 7일에 이르러 재판이 종결됐는데, 집행유예 5년으로 석방됐다.
숨어 지냈던 신성균 목사는 해방이 되자 교단 재건에 앞장섰고, 1946년부터 일 년간 공주구역, 포항구역, 예천구역, 울릉구역 등 경상북도 구역에 파송되어 순회 목사로 활동했다. 1957년부터는 충청남도 공주구역 대교교회에서 담임으로 목회했다. 1959년 2월 충서구역 구항교회에 부임해 목회했으며, 1959년 8월에는 같은 구역의 월임교회에서 목회했다. 1960년 12월에는 다시 포항구역으로 내려가 덕진교회에서 사역하다가 1962년 6월 충서구역 황산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65년 11월 은퇴했다. 은퇴 후 모교회인 점촌교회 원로목사로서 복음전파에 힘쓰다가 1982년 10월 29일 노환으로 병석에 누운 후 1985년 12월 2일 향녀 89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슬하에 5남 2녀가 있으며, 자손으로 신현만 목사가 있다.
박성도 목사(朴成道, ?-?)
신사참배 거부로 예심에 회부된 마지막 인물은 박성도 목사로, 그가 언제 어디서 출생했는지에 대한 문헌적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자리를 빌어 박성도 목사의 후손 또는 그 분에 대해 잘 알고 계시거나 문헌적 정보를 갖고 계신 분이 있다면 필자에게 연락을 바란다.
박성도가 한국침례교회사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907년이다. 이 시기 충청남도 공주에서 개최된 제2차 대화회(총회)는 영동구역 각계(丹陽)교회에서 결신한 김재형과 칠산교회의 김경춘을 함경북도 경흥지방에 파송했는데, 이들의 복음 전도를 통해 박성도가 기독교로 개종했고(이때 한봉관, 박성은 개종), 이내 이들과 함께 이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했다. 이로 보건대, 그의 고향 혹은 활동 지역이 함경북도 경흥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는 줄곧 이곳에서 전도 활동을 했다. 1909년 증산교회, 1920년 나산동교회, 1921년 웅상교회를 개척했고, 1922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개최된 제17차 대화회(총회)에서 최성업, 박성홍과 함께 감로 직분을 받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감로로써 직분을 충실하게 감당한 후 1934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개최된 제29차 대화회(총회)에서 문규석, 방사현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고 함경북도 경흥구역의 순회 목사가 됐다.
이정수 목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경흥구역에는 15개 교회가 있었다. 이를 나열하면, 고읍교회(1908), 증산동교회(1909), 김치장교회(1913), 솔봉교회(1916), 응기교회(1919), 나산동교회(1920), 웅상교회(1921), 풍인교회(1936), 약산교회(1938), 용복동교회(1938), 사회교회(1939), 홍의동교회(1939), 라진교회(1939), 남흥동교회(1940) 등이다. 박성도 목사가 이들 교회를 순회하며 목회하고 있을 때인 1942년 9월 11일, 느닷없이 들이닥친 일본 경찰에 의해 그가 불시에 체포됐다. 그는 6월 10일 이종근 감목(총회장)이 체포된 이래 가장 늦게 체포된 것으로, 그와 함께 체포된 8인 모두 함경도와 평안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는 신속히 체포되어 다른 이들과 함께 원산으로 압송됐고, 이곳 헌병대 유치장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듬해인 1943년 5월 1일 함흥 교도소로 이감되어 15일간 재판을 받았는데, 그 결과 함께 검속된 32명 중 그를 비롯한 이종근·김영관·전치규·노재천·장석천·박기양·백남조·신성균 등 9명의 교단 지도자는 일본의 검사에 의해 예심에 회부되어 재차 투옥됐고, 다른 23명은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아 1943년 5월 15일에 석방됐다. 박성도 목사는 조선총독부 검사 와타나베 레이노스케에 의해 1943년 5월 28일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에 예심이 청구됐다.
고문에 시달리며 영양 상태가 열악한 감옥생활로 인해 점차 건강을 잃어 더 이상 수감생활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일제는 1944년 2월 15일 다른 6인(노재천·백남조·장석천·박기양·신성균·김영관)과 함께 박성도 목사를 병보석으로 임시출옥시켰다. 출옥 후 그는 원산 반도의원의 차형은 원장(감리교 장로)의 호의로 병원에 입원해 여러 날 간호를 받았다. 점차 건강을 회복하던 중 같은 해 5월 10일 함흥재판소는 동아기독교회에 교단 해체령을 공표했다. 그리고 임시출옥했던 박성도 목사는 1944년 8월 8일 일제에 의해 재수감 되어 공판이 계속됐고, 9월 7일에 이르러 재판이 종결됐는데, 집행 유예 5년으로 석방됐다. 그는 함경북도 경흥으로 돌아와 요양하며 일제의 교단 해체로 흩어진 신자들을 돌보는 가운데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38선으로 인해 남북이 단절된 상태에서 소식이 끊겨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사를 아는 이가 없다.
오지원 목사
한국침례교회 역사연구소 소장
(사)침례교 역사신학회 이사